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숨 Apr 05. 2024

“괜찮아요. 안 늦게 데려다줄게”


라떼는 개근상이 성실의 척도였다. 적당히 아파도, 집에 일이 있어도, 친구와 싸웠어도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학교에 몇 년간 꼬박꼬박 출석하는 것. 그 자체로 자랑할 만하고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지금의 개근상은 부끄러움의 표징이라 한다. 학교만 다녔던 애. 여행 한 번 못 갔던 애. 연수 한 번 못 가본 애. 자존감을 다치게 하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이름값 못하는 상.


그와 상관없이 난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지각하는 꿈을 꾼다. 중압감과 걱정이 내가 두려워하는 ‘지각’으로 변모하여 잘 때까지 괴롭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지각을 두려워했다. 내 성실에 오점 한 톨도 남기기 싫었기에. 그래서인지 학창시절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물론 나만의 의지라기보다 절대 늦지 않게 날 준비시키는 엄마의 도움도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늦지 않게 날 깨워줄 엄마를 믿어버리니 늦잠자려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출근이고 뭐고 늦잠이나 자고 싶은 깊은 욕망이 깨어났나보다.


졸업 후 9년이나 지난 28세, 엄마는 출근하고 없는 어느 월요일.




새소리가 들리네.


원래 새가 이렇게 아침부터 울어댔나.


눈을 감았는데 왜 이렇게 밝지.


눈 뜨긴 싫은데 정신은 맑네. 이런 개운함 또 처음이야.


...


개운해? 월요일 아침이 개운할리가...?




"새벽아!"


새소리부터 지금 이 개운함이 비정상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기까지 3초도 안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이 들리자마자 몸이 용수철마냥 튀어올랐다.


할아버지다.


“니 회사 안 가나?”


“몇 시예요?”


(시계를 보니 8:30. 이미 출발했어야 할 시간이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어제 벗어 둔 옷을 그대로 입고, 가방을 챙기고 뛰어나갔다.


월요일이면 택시가 많이 잡힐 줄 알았는데 ‘빈 차’가 하나도 없다.


콜택시 기다릴 바에 그냥 지나가는 차가 나을 것 같아서 5분을 기다리는데도 오지 않는다.


심장이 너무 뛴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 근처에서 택시를 타야하나 머리를 굴리던 중 회색빛의 아스팔트를 씹어 먹을 듯한 아우라를 풍기는 흰색 승용차 택시가 보이는 것 아닌가.


그것도 '빈 차'인 상태로!


“여기요, 여기!”


방정맞게 손을 흔들며 들리지도 않을 부름을 크게 내질렀다.


(타자마자) “아저씨, XX역 00건물 가주세요. 출근해야 되는데 9시까지 무조건 도착해야 돼요. 어떡하죠...”


“9시까지? 좀 빠듯하긴 하네.”


“아니, 월요일인데 택시가 왜 이렇게 없을까요 ㅠㅠ”


“월요일에 쉬는 기사들도 많고 다들 바쁘니 택시 이용객도 많고요.”


“아... 제가 택시를 잘 안 타봐서요. 출근할 때 택시 처음 타 봐요. (택시 이용 연 1회 미만임)”


“아가씨 같은 사람 때문에 택시가 점점 어렵구만. 허허.”


“저... 9시까지 도착 될까요? 안 막히면 가능할 것 같은데 막히는 구간 있잖아요 ㅠㅠ”


“괜찮아요. 안 늦게 데려다줄게. 일단 숨 편하게 쉬고. 달리는 건 내가 하니까.”


열심히 팩트를 두드리고 있는 날 보시며 철부지 딸을 보시듯 웃으셨다.


“아, 정말 감사해요. 기사님!”


“그 건물이 직장이에요?”


(입 주변 화장 중) “느에. 그 건물 아네 있는 병워이 직장이에여.”


“아, 어딘지 알겠다. OO 안과?”


(화들짝) “어떻게 아세요?" (우리 환자인 줄)


“거기 유명하지. 나도 백내장(수술) 했어. 거기선 안 했지만.”


“저희 쪽에서 하시면 제가 더 신경써드릴 수 있을텐데. 하하.”


(평소엔 볼 수 없는 능청스러움. 지금 지각에서 구원해 줄 아저씨한테 없는 애교까지 보여줄 기세)


그러면서 본인 따님 이야기, 이전에 사업하시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택시를 탔을 때는 몸이 경직됐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는데 기사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계를 보는 것도 잊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지각 위기에 놓인 나를 이렇게 안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흔치 않은데.


버스 길과 택시 길이 달라서 거리가 어느 정도 남았는지 확인되지 않아 다시 불안함이 밀려올 때 기사님께 여쭈었다.


“어, 기사님! 지금 53분인데... 세이프 가능한가요? 여기 어디죠?”


“이제 좀 달리면 될 것 같은데, 잠시만.”


오, 마이... 이제 보니 여긴 정말 차가 많은 구간이다. 출근 시간엔 ‘헬’이라고 불리는 곳. 차선 바꾸는 것이 함부로 허용되지 않는 부산 중심가.


그런데, 차가 간다.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생기는 꿀렁임도 없고, 크락션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기사님은 너무 평온하시고, 주변 차들도 우릴 너무 잘 넣어주고. 아니면 기사님이 틈을 잘 찾아서 들어가시는 걸까? 무례했으면 뒤차들이 크락션을 그냥 둘리가 없는데 아무도 우리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이 기사님. 완벽하다.


“안 늦었지? 자, 출근 잘 해요잉.”


8시 58분. 계산도 센스 있게 빨리 해주셨다. 모든 행동이 군더더기 없이 민첩하다.


“기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드려요!”


8시 59분에 지문을 찍었고 심장을 가라앉힌 후 유유히 양치를 하러 갔다.


양치도 못하고 기사님이랑 그렇게 떠들었네. 죄송해라.


이 사건 이후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 택시 기사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실 택시 탈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택시가 무서워서 안 타기도 했다. 여자 혼자 택시를 타고 험한 일을 당하는 사건을 몇 번 들으니 기사님들도 괜히 무서웠다.


그런데 이 기사님을 만난 뒤로 아프거나, 빨리 가야 하는 상황일 때는 택시를 타 본다. 아이가 있고 나서는 택시를 종종 타는 편이긴 하지만 아직도 택시를 잡으려 뻗는 손이 어색하다. 어플을 이용하지 않을 때는 목적지를 설명하기 위해 택시를 잡기 전부터 속발음으로 연습을 해야 한다. 만약 기사님이 계속 말을 붙이실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된다. 정치 얘기는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날은 택시를 잡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고, 목적지를 말할 때 목소리가 또랑또랑 아주 컸고, 기사님과 그 어떤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다. 어디에 홀린 듯.


그래서 찾아 온 생각.  


둘, 나란 사람 안심이 참 빠르다.


지각 한 번 안 하게 해주겠다는 말 한 마디에 내 모든 믿음을 기사님께 드렸다. 사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사님을 믿고 그저 화장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길치인 나는 지도를 보지 않으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항상 핸드폰으로 내비게이션을 켜두는 편인데 화장하기 전 길부터 켜뒀어야 했던 것 아닐까.


물론 그 기사님은 본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날 안심시키기 위해 열심히 달려주셨다. 기사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나에게 안심시키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다. 나 이렇게 인간을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닌데. 그만큼 나에게는 지각이 큰 위기임이 분명하다.


이제는 아무리 나를 안심시키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도 내가 챙겨야 할 부분들은 놓치지 않는 날카로움을 잘 챙기자.


마침 그저께도 택시를 탔다. 장염으로 회사에서 내내 토하고 열도 나서 추운데 퇴근을 하려니 비도 와서 도저히 이 추운 빗속을 뚫고 버스정류장까지 갈 힘이 없었다. 그래서 3~4분 동안 허공에 손을 여러 번 흔든 뒤에야 겨우 택시 하나를 잡았다.


택시만 타면 그 기사님이 생각난다. 오늘은 어떤 승객 분을 안심시키고 특유의 입담으로 즐겁게 해주셨을까, 하고.


또 다시 만나면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아니, 모를 것이다. 어플로 잡은 택시가 아니니 차량번호도, 성함도 모른다. 6년도 넘었으니 얼굴도 희미하다. 그래도 우연찮게 그 택시를 탔다면 분명 기분 좋게 종착지까지 갈 것임이 틀림없다.


다시없을 만남일 것 같아 추억해보는 글.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는 나 안 사랑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