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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같이 차가우면서도 온화한 그녀, 폴리아후





하와이 유일한 설산


하와이 섬 중에서 가장 커서 지어진 이름, 빅아일랜드. 우리나라 제주도의 6배나 되는 크기다. 여전히 활화산이 숨쉬는 빅아일랜드 한복판에 설산이 있다는 걸 알고선 처음엔 참 의아했다. 하와이하면 뜨거운 태양과 열대바람이 떠오르지만, 이곳에도 설산이 있다. 바로 마우나케아(Mauna Kea)다. 하와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름부터가 '흰 산'을 뜻한다. 하와이에서 유일하게 눈이 내리는 이 곳은 겨울철 산정상에 많은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매섭게 분다. 열대섬 사람이 보기에 얼마나 신비로운 광경이었을까.



그들은 이 희귀한 시간을 산정상에 눈과 얼음의 여신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폴리아후(Poliʻahu) 여신은 그렇게 탄생했다. 산 꼭대기는 폴리아후가 머무르는 영적인 공간이며 태양빛에 더 새해얀 빛을 뿜어내는 눈은 여신이 펼쳐놓은 하얀 망토(white kapa) 때문이라고 여겼다. 참 낭만스런 비유가 아닌가 싶다.


폴리아후 여신은 차가운 눈과 바람을 매섭게 몰고 다니지만, 놀랍게도 온화한 어머니이자 생명의 보호자로 여겨진다. 차가운데 동시에 온화하다니. 너무도 상반된 온도에 어리둥절했다. 하와이 땅과 그들의 삶을 더 살펴본 후에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불과 눈, 파괴와 보호


하와이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활동이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다. 특히 빅아일랜드의 킬라우에아(Kīlauea)와 마우나로아(Mauna Loa)는 '불과 용암의 여신' 펠레가 지금도 성성히 살아 숨쉬며 용암을 뿜어내고 섬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2025년 2월에는 킬라우에아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122미터까지도 분출했다. 다행히도 이번엔 민가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화산 폭발이 재난으로까지 이어지면 시뻘건 용암은 삶의 터전인 마을과 숲을 소멸시키고, 도로를 뒤덮어버린다. 지옥불이 현현해 모든 걸 거침없이 태워버리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껴야할 절망과 공포. 이런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하와이 사람들은 뜨거운 화산을 다스릴 수 있는 차가운 힘이 너무도 절실했을 것이다. 뜨거운 화산이 폭군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때, 차가운 눈과 바람이 공동체의 터전을 보호해주길 바랬을 테다. 폴리아후는 단순한 이야기거리가 아니라, 그들의 절박한 염원이었다.


실제로 하와이 신화 속에서 폴리아후는 불과 용암을 다스리는 여신 '펠레(Pele)'와 자주 대립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펠레는 마우나케아를 차지하려 했지만, 폴리아후가 하얀 눈을 내려 그녀의 뜨거운 용암을 식혀버렸다고 한다. 결국 펠레는 마우나케아를 포기하고, 마우나로아와 킬라우에아로 자리를 옮겼다고 전해진다. 마우나케아가 지금은 휴화산이고 다른 두 화산은 아직도 젊은 활화산이니 전설 이야기가 참 절묘하다.


언제 갑작스럽게 화산 폭발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폴리아후 여신이 펠레 여신의 힘을 가라앉혀주실 매일 바랬을 것이다. 그들에게 폴리아후의 차가움이란, 단순히 매정함이 아니라 뜨거운 재앙을 잠재우고 생명을 보호하는 힘을 가진 어머니로 여겼던 것이다. 하와이 특유의 자연환경은 차가움이 오히려 따뜻한 모성이란 역설을 자연스럽게 이해시켰다. 눈과 얼음을 다스리지만 내면은 따듯하다는 점이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를 떠올리게도 한다.

















내 안의 활화산을 다스리는 힘.


감정이 무디지 못할 때, 얼얼한 마음 상처가 날 때가 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파장을 만들고, 뜨거운 감정이 들썩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 역시 폴리아후 여신이 내 안에 깃들길 바래본다. 차가운 바람이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를 달래주고, 멍해진 머리를 식혀주길, 폴리아후의 망토가 나를 감싸 뜨거움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감정의 균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격려해주길 바래본다.


우리 안에도 활화산이 있다. 이 활화산을 어쩌지 못해 두려울 때도 있다. 분출할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을 다스릴 힘이 필요할 때, 폴리아후 여신처럼 차가운 침착함이 속을 달래주길 바란다. 하와이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던 염원이, 실은 내게도 절실했던 '차가운 바람'이었음을 깨닫는다. 폴리아후의 냉정하지만 현명한 힘을 가슴에 새겨본다.







- 훌라춤추고 명상하는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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