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명의여명 Nov 01. 2022

‘대단하다’ 보다 ‘감사하다’가…

행복의 속도 (2020) – 박혁지

https://youtu.be/ITGdSwrsTrM


도쿄의 북쪽, 도호쿠, 호쿠리쿠신에쓰, 간토 지역 사이에 오제 국립공원이 있다. 약 372km2 규모에 오제가하라 습지가 유명한 해발 1,500미터의 고원이다. 이 오지를 세상과 이어주는 사람들, 짐꾼 봇카의 이야기가 ‘행복의 속도’라는 이름을 달고 펼쳐진다.



‘봇카’는 오제의 짐꾼들이다. 오제 안에 위치한 산장들까지 물건들을 배달하는 것이 주 업무인 그들은 보통 80-100kg의 짐을 등에 지고 오제를 누빈다. 계절성인 그들의 직업은 오제 안 산장이 문을 여는 4월에서 11월까지이다. 길이 아직 얼어있는 봄에는 좀 가볍게 시작하여 가장 바쁜 여름 동안에는 짐의 무게가 늘어난다. 산장에는 주로 신선식품들을 많이 배달하게 되는데, 냉동식품 같은 것들을 헬기가 쉽게 쉽게 옮기는 것을 보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거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관측소같이 사람이 없는 산장 이외의 곳에도 배달할 거리들이 생기곤 하는데, 배터리 교체같이 단순한 배달 업무 이상 일 때도 있다. 일본청년봇카단의 대표이기도 한 ‘이시타카’는 봇카를 더 알리고 확장하고 싶어 하지만,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는 조금 생각이 달라 보이기도 한다.


봇카들의 일 년을 따라 움직이는 영화 속 오제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습지 위로 놓여 있는 좁은 데크길을 따라 한 발짝씩 움직이는 봇카의 발 옆으로 보이는 것이 동의나물인가 싶다가, 잠깐 쉬는 사이 물가에 보이는 것은 오제에서 유명하다는 물파초인 것 같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무거운 걸음을 하는 봇카들은 오제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가장 가까이서 살피는 이들이기도 하다. 계절의 변화에 반응하는 오제 동식물들을 가장 빨리 알아차리는 이들이자 변화하는 환경이 오제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매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깨에 제 몸무게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길을 걷는 사람들, 그들이 걷는 모양새는 트레킹이나 탐사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중심을 잡기 위해 약간은 굽은 자세, 팔은 꼬아서 몸에 꼭 붙여둔 모습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일어나는 순간이 가장 힘이 든다. 봇카들 마다 가진 특별한 걸음 모양새처럼 일어나는 기술도 모두 조금씩 다른 듯하다. 누구에게나 내 몸에 맞게 일어나는 방법이 있다. 그게 짐을 짊어진 봇카이든, 첫걸음을 내딛는 아이이든…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눈앞에 다음 발을 디딜 바로 그 지점밖에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온다. 들리는 건 가쁜 호흡 소리와 숲의 바람소리뿐. 그렇게 한 걸음씩 가다 보면 목적지에 닿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밟아온 무거운 걸음에 누군가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봇카의 일은 체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서둘러 가면 지치는데, 자기 페이스로 걷다 보면 괜찮다


짐을 나른 뒤 더위를 식히기 위해 티셔츠를 벗은 이가라시의 등과 목에는 짐의 무게가 그대로 자국이 되어 남았다. 발바닥은 굳은살이 박혀 단단하다. 그렇게 일에 맞추어 몸이 변해간다. 환경에 맞추어 몸을 변화시키는 나무들의 모양새에 감탄하지만, 사실 인간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 삶의 모양, 삶의 속도에 맞추어 변한 것이 지금 내가 가진 몸의 형태이다. 하루 내내 TV 앞에서 게임을 하던 이가라시의 아들은 어떤 몸을 갖게 될까?




걸어가는 봇카들을 따라가는 영화는 이미 느리다. 그런데 그 걸음을 영화 속에서 종종 슬로모션으로 재생한다. 느린 만큼 집중하게 된다. 느린 만큼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행복의 속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내게 맞는 속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속도, 아니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속도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슬로모션으로 영상을 보여주려면 고속촬영을 해야 한다. 초당 24 프레임/30 프레임으로 찍은 영상을 끊김 없이 슬로모션으로 재생하기 위해 초당 수백, 수천 프레임의 촬영을 하기도 한다. 얼핏 들으면 약간 아이러니하다. 아니 느림 속 아름다움과 행복을 알 수 있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과 정보와 경험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넓은 고원의 초지를 보니 지난번 다녀온 곰배령이 생각났다. 다시 가면 어떤 속도로 걷게 될까?




뜬금없는 덧글 1


분명히 우리나라의 산에도 비슷한 직업군이 있을 것 같아 둘러보았더니 설악산의 마지막 지게꾼 임기종 씨를 소개한 꼭지 영상들을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네팔의 셰르파와 중국 화산의 짐꾼들 이야기도 찾아 읽어보았다. 조금씩 다르지만 뭔가 비슷한 사람들, 산을 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감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고된 인생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숲을, 산을 가까이하고 싶은 이유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뜬금없는 덧글 2


짐을 지는 사람들을 보니, 뜬금없이 자연 속에서 짐을 지는 곤충들이 생각이 났다. 주로 개미나 벌같이 집단생활을 하는 곤충들은 끊임없이 짐을 지고 나른다. 그들이 짊어지는 짐의 무게는 얼마나 될지, 그들이 짐을 지고 걸어가는 거리와 속도는 어떨지 뜬금없이 궁금해진다. 다른 이들을 위해 짐을 지는 그들의 한 걸음, 날갯짓 한 번에도 어마어마한 나비효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에 우주 속을 한참 헤매다 돌아왔다.



뜬금없는 덧글 3


오제의 할미새는 신이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 꼬리 치는 모습으로 신에게 아기 만드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80 만신의 나라라고 하는 일본의 어느 신이 할미새에게서 영감을 얻었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의 숲해설가들이 풀어놓는 이야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어그'의 1000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