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약 어렸을 적 그러니까 취학 전에 읽고 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는 아마 모글리와 개구리 왕눈이, 빨간머리 앤과 소공녀, 그리고 비밀의 화원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이 중 비밀의 화원이 가진 지분이 가장 작을 것 같긴 하지만 혼자 남은 상류층 고아소녀의 모험기는 어린 여자아이를 꿈꾸게 하는 힘을 가득 담은 동화였다. 그 뒤로 어른이 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숲영화를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기억 속에서 건져 올렸다. 찾아보니 비밀의 화원을 원작으로 한 실사영화 '시크릿 가든'이 만들어 개봉된 것이 최근의 일이다. 숲극장에 한 자리 드려야겠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만든 이야기들은 소공녀 빼고는 다 숲의 손길이 닿아있는 이야기들이다.
어릴 적 읽었던 '비밀의 화원'을 생각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황무지와 그 황무지를 채우고 있던 히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땐 마냥 어떤 풀이겠거니 했었다. 책 속의 묘사로도 키가 큰 나무는 아니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며 황무지를 채우고 있는, 그래서 넓은 황무지를 마치 바다처럼 보이게 했다는 그 히스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했더랬다. 지금에 와서야 찾아본 히스는 진달래과의 Calluna vulgaris라는 소관목이었다. 그리고 여름철 스코틀랜드의 황무지를 아름답게 물들였다는 묘사답게 아주 예쁜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었다. 영화의 도입부, 미슬스웨이트로 가는 길의 황무지는 그렇게 어두웠다. 영화에서 히스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머릿속에서 그리던 이미지가 화면에 보여지는 모습에 살짝 감동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보여지지 않았지만 그 황무지가 히스 꽃이 피면 어떻게 바뀔까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했다. '비밀의 화원'을 통해 만난 두 번째 친구는 '울새'였다. 나중에 영국의 자장가 마더구스를 통해 조금 음침한 이미지가 덧씌워졌지만 이 비밀의 화원에서 처음 만난 울새는 장난꾸러기에 비밀을 가득 품은 친근한 이미지였다. 잠긴 화원의 열쇠를 찾아주는 울새는, 그렇게 마법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것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메리가 이모부의 저택 미슬스웨이트에 적응하는 과정도 한 번에 한 걸음 씩 이루어 젔다. 지저분한 야생개와 친구가 되어 어릴 적 친구였던 인형 제마이마의 이름을 붙여주고, 투덜거리며 돌보아주기만을 바라던 저택의 하녀 마사와 데면데면하지만 조금씩 가까워졌다. 한 밤중에 메리를 깨웠던 울음소리의 주인인 사촌 콜린과 만나고 마사의 동생 디콘과도 친구가 된다. 그리고 이모부와의 만남 이후 저택에 적응해 갈 무렵, 거대한 담 너머 비밀의 정원을 만나게 된다. 이모가 죽어버린 뒤에 출입이 금지되었던 정원, 그 정원에 들어가면서 미슬스웨이트에서의 그녀의 생활은 모험으로 가득 차게 된다.
물이 흐르고 이끼로 덮인 바위 골짜기를 지나 개울이 흐르고 처음 보는 식물들로 가득한 정원에서 메리는 제마이마와 함께 한때 잃어버릴 뻔 했던 메리의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도 다시 꽃 피우게 된다. 울새의 도움으로 열쇠를 찾아낸 메리는 다시 담을 넘어 저택으로 돌아가고 이 신비로운 화원과 흥미로운 것들이 숨겨진 듯한 미슬스웨이트의 비밀을 찾기 시작한다. 마법에 걸린 곳, 새가 노래하고 개가 놀아주는 곳, 메리가 콜린에게 비밀의 화원을 소개한 방식이다. 등이 굽을 것이라 믿고 침대에 누워만 있던 이단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 비밀의 화원의 마법을 믿는 메리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영화 속 공간은 갑갑하고 어둠침침한 죽은 것들로 가득한 것만 같은 저택과 밝고 활기찬 생명을 품고 있는 '시크릿 가든'으로 양분된다. 그 각각의 공간에서 인물은 다른 사람이 된다. 저택에서 불퉁하고 불쾌하며 투덜거리고 눈치를 보던 메리는 담 넘어 정원으로 들어간 순간 너그럽고 넉넉하며 포용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우울하고 침통해하던 콜린 역시 정원에 들어와서는 삶과 건강을, 웃음을 찾았다. 그리고 굳어있는 표정으로 부유하는 유령마냥 저택 안을 서성거리던 이모부 역시 집이 불에 탄 뒤 아들을 찾으러 정원에 왔을 때 달라졌다. 그곳에서 부인이 죽은 뒤 그 정원을 마치 죽음을 불러온 저주받은 곳 인양 돌아보지 않고 잠가버렸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정원에서 그는 10년은 젊어진 듯,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아들을 향한 사랑과 염려를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 그렇게 양분된 공간에 덧씌워진 의미는 저택을 어른의 공간, 죽음의 공간, 과거의 공간으로 만들고, 정원과 자연을 아이들의 공간, 삶과 생명의 공간, 미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책에는 없었던 화재는 아마도 이런 과거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인물들을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정원이 살린 것은 콜린이었을까 아니면 콜린의 아버지였을까?
영화 속 비밀의 화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식물은 모두 환상적이다. 마법이 실재하는 듯 정원 속 식물들은 크기도 모양도 행태와 움직임도 조금씩 다르다. 처음 물 속에서 혼자 헤엄치는 콜린의 긴장을 함께 바들거리며 느껴준 고사리들과 콜린의 거부에 마음을 다친 메리가 가는 길 뒤로 시들어버리는 거대한 잎들 (돌단풍 잎들과 닮았다), 마치 옷의 무늬인 듯 메리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모두 이 비밀의 화원이 가진 비밀과 마법을 시각적으로 너무나도 아름답게 표현해 주었다. 메리가 콜린을 처음 비밀의 화원으로 데리고 간 날, 문을 열고 입장하는 콜린을 반겨준 것은 하늘을 뒤덮은 노란색 꽃의 물결이었다. 너무나 화려하게 길을 장식하고 있던 그 꽃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Laburnum anagyroides 라는 학명을 가진 콩과의 금사슬나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이 비밀의 화원을 가득 채운 아름다움 식물들이 하나하나 궁금해졌다.
비밀과 마법, 사실 식물을 공부하면서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풀과 나무를 구별하는 것도 어려웠던 그때, 숲 속은 훨씬 더 신비로운 곳이었던 것 같다. 미지의 것들로 가득한 곳, 빛과 물과 공기만으로 혼자 자라는 신비로운 연금술을 시전하는 식물들이 가진 비밀로 가득한 곳이었다. 물론 지금도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수백 배 많기는 하지만 조금씩 숲의 비밀을 알아가면서 나의 시각이 즉물적으로 변해온 것은 아닌가? 앞으로도 공부는 계속되겠지만 숲의 신비에 대한 경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시크릿 가든'이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살리고 있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뜬금없는 덧글 1
촌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미상관을 좋아한다. Cinewald at Dawn을 시작한 영화는 '해프닝'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는 나무들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무리는 사람을 살리는 나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심각하게 식물이 얼마나 지구를 살리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다큐로 갈 수도 있었지만 '살린다'라는 것이 단순하게 산소를 공급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기능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에 더 중심을 두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뭐 2차 세계대전 이후라 딱히 완벽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콜린은 그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충분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의식주는 충분히 제공되고 있었고, 책으로 지적 호기심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거대한 저택의 밖에 있었고, 메리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을 때 정원의 나무는, 자연은 그를 '살릴'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사람을 '살리는' 나무의 이야기로 선택되었다. 사실은 너무나도 흔해 빠진 이야기이지만…
뜬금없는 덧글 2
이렇게 어찌어찌 일 년간의 숲영화 기행을 마치게 되었다. 살펴보니 부끄러운 글로만 가득한 것 같기도 하고, 했던 이야기를 주구장창 계속해서 해 온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소개하고픈 영화 중에는 수입이 되지 않았거나 국내판권이 말소되어 버린 탓에 볼 수 없어 포기한 영화들도 많고, 적절한 타이밍을 찾다가 놓쳐버린, 그러니까 아끼다가 x되어버렸다 싶은 영화들도 있다. 중간에 게으름을 피웠던 시기도 있었고 아등바등거리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겨버리고 입 닦아 버린 때도 몇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일 년 동안 소개해온 영화들을 살펴보니 스스로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여기 소개된 영화들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챙겨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 한 편의 영화라도 마음에 닿는 영화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언젠가 함께 만나 영화와 숲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