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
우리는 관계를 ‘관심’의 양으로 재고 싶어진다. 누가 먼저 연락했는지, 내 이야기를 얼마나 기억하는지, 내가 힘든 티를 냈을 때 얼마나 달려와 줬는지. 그런데 그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마음이 묘하게 가난해진다. 상대가 나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세계가 너무 빽빽해서 내 자리까지 넓게 비워두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렇다. 답장을 미루고, “나중에 얘기하자” 해놓고 까맣게 잊는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나 역시 내 하루를 겨우 건너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상처는 남는다. “나는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데, 왜 아무도 나만큼은 아니지?”라는 질문이 목 안쪽에서 자라난다. 그때 나를 더 괴롭히는 건 ‘상대의 무심함’ 자체보다, 그 무심함을 곧바로 ‘나는 소중하지 않다’로 번역해 버리는 내 마음의 습관이다. 마크 트웨인은 “내 인생에는 끔찍한 일들이 아주 많았지만, 그중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관심에 대한 불안도 비슷하다. 실제로는 그냥 바쁜 하루였을 뿐인데, 나는 혼자서 “나를 싫어하나?” “나만 문제인가?” 같은 시나리오를 끝까지 써 내려간다.
이 문장을 다르게 읽어보면, “세상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차가운 진실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자유가 된다. 실수 하나가 평생 따라올 것 같고, 어색한 말 한마디가 관계를 망칠 것 같고, 사람들이 내 감정을 다 알아챌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남의 실수보다 자기 실수에 더 오래 머문다. 남의 표정보다 자기 표정에 더 민감하고, 남의 평가보다 자신의 불안에 더 시달린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위로로 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관객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편해진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하고, 가장 먼저 알아채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가족은 나의 가장 가까운 타인이기도 하다. 그들도 그들의 피곤과 걱정이 있고, 사랑이 있어도 표현이 서툴며, 관심이 있어도 방식이 다르다. 가까워서 더 못 볼 때도 있다. 내 변화를 ‘성장’으로 보는 대신 ‘원래 그런 애’로 고정해 버리기도 한다. 서운하지만, 그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삶의 중심을 “누가 나를 봐주느냐”에서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건, 내 가치를 타인의 주목으로 재지 않는 일이다. 누군가의 무심함이 내 존재를 깎아내리도록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관계를 끊고 혼자 버티라는 뜻이 아니라, 내 존재의 기준을 세상 밖이 아니라 내 안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 생각이 인간관계를 가볍게 만들진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관심이 필요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생명줄처럼 느껴진다. 다만 나는 이제 관심을 요구하기 전에 작은 확인을 한다. 내가 원하는 건 정말 ‘관심’일까, 아니면 ‘안심’일까.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주길 바라는 마음 뒤에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인 욕구가 숨어 있다. 그 확인은 때로 타인이 아니라 내가 줄 수도 있다. 오늘 하루를 살아낸 나에게 “오늘도 잘 버텼다”라고 말해주는 방식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나에게 덜 관심을 준다는 걸 받아들이면, 내가 타인에게 건넬 수 있는 관심의 질이 좋아진다. 관심을 거래처럼 주고받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해줬으니 너도 해줘”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하겠다”로 움직이게 된다. 기대가 줄면 서운함도 줄고, 서운함이 줄면 관계는 더 오래간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오히려 더 잘 돌아온다. 계산하지 않았는데 남는 온기 같은 것.
결국 이 주제는 냉소가 아니라 균형감각이다. 세상은 나에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 친구도, 가족도, 나를 사랑하지만 늘 나를 중심에 두지는 못한다. 그 사실은 서운하지만 동시에 정상이다. 정상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불필요한 상상에서 벗어난다. “다들 나를 싫어하나?” 같은 과장된 결론 대신, 더 현실적인 질문으로 옮겨간다. “지금 이 관계에서 내가 바라는 건 뭔가?” “그 바람을 내가 먼저 나에게 줄 수 있나?”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는, 필요한 방식으로 말했나?”
세상이 나를 바라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나를 바라보기로 한다. 누군가가 내 하루를 다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내 하루를 끝까지 알아주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먼저 누군가를 바라보기로 한다. 관심이 희소한 시대에, 작은 관심 하나가 사람을 살릴 때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나는 세상보다 조금 더 나에게 관심을 주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세상보다 조금 더 따뜻해지기로 한다. 그 정도면, 충분히 살 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