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
고등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 유학을 결심해서 실행하는 데는 서너 달이 걸렸다. 일반적인 준비기간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준비를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진학한 고등학교의 낮은 입학기준과 내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때를 놓치면 영영 한국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학교는 여러 우연과 인연으로 찾아냈다. 한국인이 한 명도 없던 미국 남부의 사립 크리스천 학교다.
미국 남부에 직접 오기 전까지는 이곳에 대해서 아는 점이 거의 없었다.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지역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한국에서도 소수자인 나로서는 도긴개긴이었다. 성소수자 여성으로서 자라나는 동안 공동체에서 차별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따라 큰 기대 없이 온 곳이었지만 여전히 내 생각과는 달랐다. 친구를 사귀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무언가 이질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내 영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감각은 이삼 년이 지나도 계속됐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사람이기 전에 아시안이었다.
나는 항상 대표성을 갖게 됐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말은 나라서 하는 일이 아니라 코리안이라 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가령 내가 어떤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게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줄 몰랐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 드라마는 내가 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뒤에 방영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에도 한국이나 아시아에 관한 질문은 전부 내가 떠맡았다. 한국이 싫어 미국으로 온 나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갔다.
사실 이걸 깨닫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맞추고자 정치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닫았고(아무리 그래도 공화당 지지는 못하겠더라) 종교에 대한 이야기도 말을 줄였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틀 안에서만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깨닫자 다 귀찮아졌다. 프랭키와 그레이스가 말하듯 "Fuck it!"이라는 심정이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 써서 내라고 하셨다. 결과들을 쭉 훑어보던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어떻게 이 학년은 민주당 지지자가 한 명도 없나?"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바로 손을 들고 말했다. "저 민주당 지지하는데요." 시선이 모두 나에게 꽂혔다. 곧 친구가 "뭐야, 난 너 똑똑한 줄 알았는데."라며 장난기와 실망감이 섞인 말을 건넸지만 후회는 되지 않았다. 큰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가장 나 자신으로 느껴졌던 순간이다.
그 뒤로 나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민주당까지 대변해야 했다.
작은 학교의 유일무이한 민주당원으로서 나는 민주당의 정책과 이념을 질문하는 친구들에게 뭐라도 답을 해야했다. 그때도 트럼프가 대통령인 시기였으니 할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처음에는 다소 공격적으로 묻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자주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싫든 좋든 알아가는 것 같았다. 물론 의견 합치는커녕 끝까지 언성이 높아지도록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들도 많았다. 주로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와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얘기였다. 이 탓에 커밍아웃은 결국 못했다. 그렇지만 초반의 열정적인 모습과는 상반되게 그런 친구들이 직접 그런 대화를 본인이 점점 줄여갔다.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이때 친구관계가 많이 변화했지만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건 미술 선생님과의 관계였다. 그분은 신자유주의적이고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으니 나와 반대 격인 사람이었다. 나는 시니어로서 일정이 많이 느슨해졌을 때 거의 그분 교실에서 살다시피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미술도 많이 했지만 주로 사회 전반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의 혁명들과 현재의 정책까지 많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리 중 누구도 의견을 바꾸진 않았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고 대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그걸 가능하게 한 건 선생님의 태도였다. 그분은 나를 나로서 받아들이며 내 의견을 편견 없이 들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민주당 지지자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나로서 말할 수 있었다. 그분이 있을 때는 다른 학생들과도 더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모두에게 정확하고 필요한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내 입장을 해명하듯이 설명하지 않고 서로 토론할 수 있었다. 그 교실에서 보낸 수없는 시간 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쳤다.
다른 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그가 나와 얼마나 비슷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나는 미술수업을 처음 들을 때 선생님과는 미술사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우리가 서로 관심 있는 분야가 너무나 다르다보니 미술에 관한 대화는 시시하게 끝이 났다. 대신에 정치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이분이 어떤 가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떤 것에 눈을 맞추고 어떤 것에는 눈을 감는지부터 상대의 말을 얼마나 꼼꼼히 듣는지, 어떤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지를 알게 됐다. 그렇게 알게 된 대부분은 나와 매우 달랐지만 사람으로서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모두 다르다. 아무리 같은 걸 믿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는 다르고 아무리 같은 곳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그곳에서 얻는 경험은 다르다. 같은 점을 찾아 그는 이런 사람일 것이다 라고 기대하며 관계를 쌓는 것은 어떻게든 실망으로 다가온다. 나는 서로가 아무리 비슷하거나 다르다고 해도 이해와 수용은 공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분 덕에 나는 많은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감히 사랑할 수 있었다. 물론 끝까지 이해할 수 없고 답답했던 점들도 있었지만 이제 그것에 나를 갉아먹도록 스트레스받진 않았다.
졸업하고 나서 남은 기억들의 대부분은 길었던 첫삼년이 아니라 마지막 일 년에 있다. 후련하기만 할 줄 알았던 졸업식에 사뭇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삼 년 동안 알아간 것보다 근 몇 달 간 더 깊이 알아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알아간 나는 거기서 끝임이 잔잔히 느껴졌다. 나는 먼 동부로 떠나므로 많은 인연은 점점 옅어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그런 마음과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와서 사 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게 아깝지 않았다. 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다른 어디서도 배우지 못했을 것 같다. 이것을 기반으로 삶을 살아갈 때 나를 지키며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글은 당신에게 당신을 부정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열어보이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뜻은 아니다. 나의 일은 아주 운이 좋았던 것임을 인지한다. 내가 나를 열어보일 수 있었던 데에는 내가 곧 그곳을 떠난다는 사실도 있었고 그래도 나를 지탱해줄 친구들의 덕도 있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부 내비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가령 내가 성소수자임은 끝끝내 밝히지 못했듯이.
만약 당신이 당신을 열어보이고 싶지 않다면 열어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가장 우선으로 둬야할 것은 우리의 안전이다. 그리고 여기서 안전은 정신건강도 포함한다. 그걸 위해서 당신을 완전히 열어보이는 것도, 부분부분만 열어보이는 것도, 모두 숨겨두는 것도 다 괜찮다. 지금이든 미래에든 당신이 어디에 있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명심했으면. 나도 존재가 논란이 되는 삶이 어떤지 알기에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