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건 어떤 일일까. 나는 평생 그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되돌아보면 모든 게 환영 같다. 엊그제 문득 나는 생각보다 많은 글을 읽었고 생각보다 적은 사람을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읽었던 책들이 가득한 방은 따뜻하겠지만 그간 사랑한 사람들이 모두 모인 방은 차갑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에는 내가 혹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결국 지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책들, 영화들은 내 안에서 빛을 잃고 "그랬던 것"이 되는 건 아닐까. 몇 년 낀 반지가 손가락에 얇게 패인 자국을 남기듯 결국 그 정도의 깊이로밖에 내 안에 남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내 안이 먼지로 가득 찬 것 같다.
사람은 기억으로서 형성된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모르겠다. 모든 기억이 커다란 솥 안에서 끓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바라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을 잇는 인연도 한없이 얇아 보인다. 나는 모든 걸 끊어내고 가본 적 없는 나라에서 몇 달을 살다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나도 모르게 자주 한다. 실제로 행하려면 몇 달간 준비해서 뼈대 있는 계획을 만들겠지. 그러면 이 상상도 현실과 닮아져서 지루해질 거다. 일부러 비자나 계좌 같은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작정 공항에 가서 표를 사고 당장 떠나서 작은 호텔에 묵는 동안 기차표를 알아보고...... 다시 떠나고 도망가고 나는 자유로울 것만 같다. 나는 예전부터 도망치는 존재가 아닐까? 내 인생이 꼭 무언가에게서 도망치는 복잡한 여정 같다.
나는 자기 전이나 멍하니 있을 때 마음속에서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생각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원하는 일을 하고의 차원이 아니라 이상적인 이념을 가진 국가에서 걱정 없이 글을 쓰고 읽는 삶이라던가, 그 정도의 상상을 한다. 한국에서 살 때는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외국에서는 어느 정도 흔한 것 같다. 그런 상상을 하고 나면 현실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다. 중학생 때 도덕 선생님이 말한 큐브가 생각난다. 이 가상의 큐브는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그가 가장 행복할 만한 가상공간을 만들어준다. 그는 거기서 행복하게 살다 더 이상 어디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해 지면 고통 없이 죽는다. 그때는 여기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냐는 옆자리 친구 말이 참 의아했었다. 행복할 수 있다면 세계가 진짜든 가짜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바라는 게 무엇일까. 지금은 만나던 사람과 시간을 갖고 있다. 이런 문장 뒤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치졸한 이야기가 따라붙는 점이 싫다. 담백하게 쓰는 것도 재주겠으나 나는 그런 게 없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기분이다. 내 마음은 어디론가 가고 있고 나는 그걸 찾아다니고 있다. 이 거리가 충분히 멀어지면 저걸 두고 공항에 가야지. 비행기를 타고 모르는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