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작가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고
쓰는 일보다 읽는 일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엔 글에 대한 사랑이 있다. 계속해서 글을 읽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쓰는 사람들밖에 없어 보였다. 나는 글을 읽을 때 가장 안온한데 그러려면 쓸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도 그건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글은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하지만 다른 공부를 하고 다른 일을 하면서 그런 여유를 찾는 건 어렵다. 현실은 아주 매끄러운 얼음판 같아서 한번 미끄러지다 보면 어느 모퉁이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그 속도를 알 수 없다. 그렇게 지내다 마음이 동날 때만 글을 읽는 빈곤함에 익숙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배수아 작가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읽고 있다. 장편소설이면서 은근히 산문 같은 소설로 배수아 작가의 다른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다. 작가의 일기를 훔쳐 읽는 것 같은 부분들이 많다. 부드러운 흐름과 적절한 속도감으로 쓰인 문단마다 읽으면서 헛웃음이 나올 만큼 좋은 문장들이 가득하다. 작가로 보이는 한국 여성이 베를린에서 지낸 이야기인데 근처 네덜란드에 사는 나로서 그려지는 이미지가 분명해서 더 이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산문 같으면서도 서양 고전 같은 작품이다.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손에 꼽게 좋고.
이런 글을 암스테르담 시내의 카페에서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내가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통계를 배우는 대신에 보부아르를 읽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한다. 중학생 때는 한 사십이 될 때까지 읽고 쓰기만 하다가 자살하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렇기에는 너무나 많은 걸 좋아하게 됐다. 그때는 예술이고 글이고 그런 게 너무나 막중하고 궁극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한몫했었다. 인간성을 넘어선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려서는 예술이고 인간이고 하는 걸 오래 생각하게 되나 보다. 그때는 다다이즘에 몰입했던 탓에 뒤샹의 조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여러 개 찾아보기도 했다. 이제 그런 예술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고 오키프나 클린트, 헤세의 작품이 좋다. 예술에 대해 말하는 예술에 조금 지쳤고 본인과 여성성, 내면에서 피어나는 작품들이 좋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해 말하는 예술이 경제이론보다 좋은 것도 사실이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쓸데없는(따지자면 다르게 말할 수도 있지만) 글과 예술이 주는 깊이가 있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등장하는 요하임과 M은 아주 다르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집에 있는 책 중 문학이라곤 해리포터 시리즈와 아메리칸 사이코밖에 없는 공작자 요하임과 언어의 본질을 문학이라 여기는 M 사이에는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간극이 있다. 그 차이는 슬프게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란 걸 오랫동안 체감하고 있다. 예술을 이해하고 저자의 요지를 알아내고를 떠나서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지는 현실의 기저에 존재하는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그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알아채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게 가능하지 않으면 대화할 때 요지가 달라지더라. 그리고 이게 책 몇 권으로 메워지지 않는다는 게 참 슬프다.
그래서 읽을 때만 행복하고 읽기에 멀어지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뭣도 아닌 지적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것 같아서 역하긴 하지만, 함께 읽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적고 결국에는 책과 나만이 얘기하는 것 같을 때가 많아서... 좋은 글을 읽을 때면 완전히 이해받는 기분이지만 동시에 내가 얼마나 이해받지 못했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그동안 내가 나눴던 대화들이 얼마나 표면적이었고 나는 그동안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는지. 그렇게 알아가는 깊이는 날 풍요롭게 하면서 동시에 나를 가둔다. 두 언어로 말을 하면서도 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대신 말할 책들 사이로 나를 흘려보낸다.
예술에 대한 예술에 지쳤음에도 글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이 참 웃기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