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점을 단점으로 만드는 것

말을 하는 일의 번거로움과 정상성의 틀

by 김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원체 말수가 적었다. 애매한 말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후회돼서 약간만 아니다 싶어도 말을 안 하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하고 싶은 말 자체가 적어졌다. 나는 내가 어떻게 보여지고 내 자리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했고 그걸 아는 건 어른들 중에서도 아주 드물다는 걸 모르고 전부 알지 못함에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방어기제였을 수도 있고 내 성향 자체가 예민한 탓이었을 수도 있고... 하여튼 나는 자가 인식에 몰두하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어색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가 됐다. 이건 나를 꽤 오랫동안 괴롭혔다. 말수가 적은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기본적 인간상에서 멀어지는 일은 수많은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에,

노동계층이 사람다운 삶을 위해 지속하는 노동은 단순히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일에 제한되지 않는다. 본인이 현상황에 적합한 노동자임을 매일 증명해내는 일 또한 필수적 노동에 해당되며 이 일은 소수자에게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대부분의 사회, 특히 한국처럼 일률적인 사회에는 정상성을 규정하는 틀이 있다. 성별에 맞는 옷과 외모, 말투를 유지하고 어느 주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말하고, 조금이라도 퀴어스러운 것은 금지되고... 이 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 모두 몇은 알고 그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틀에 의해 깎여나간 모서리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도.

나는 이 틀에 잘 맞지 않는다. 내 특성 중 몇을 꼽아 이것들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찾다 보면 맞는 부분이 더 적다. 말하는 일과 남에게 나를 표하는 일이 그렇게 지치던 건 그 틀을 더듬어가며 그 안에 맞는 것만 꺼냈어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 번거롭다. 어려서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 과정을 거쳐내는 동안 나는 내가 말수가 적은 점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큰 단점 중 하나고 언젠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봤다. 최근이 되어서야 내가 나의 말재주 없음을 그저 나 자신의 특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틀의 기반을 되짚어보자. 이 틀의 기저에는 사회적 정상성이 있다. 이분화된 성별 구조, 이성애를 기반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나이에 따른 서열문화 같이 특성 계층만을 숭상하는 관념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정상성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노동자를 만드는 요소들이 덧붙여져서 만들어지는... 이런 식으로 말하면 너무 불만이 많아 보이나? 그렇고 그런 표면적인 사람으로 비칠 게 싫어 다르게 쓸까 생각했는데, 이것 또한 좋은 예시 같다. 조금이라도 틀에 맞추도록,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왜 이런 틀에 맞추느냐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대답은 그래야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여겨지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겠지. 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만 사람들이 당신의 의견을 듣기 때문이다. 너무나 틀에 벗어난 사람의 의견은 쉽게 무시된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이하의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의견이 그 틀에 대한 도전일 때는? 틀에 너무 벗어나지 않은 채 틀을 비판하는 이상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틀에 대해 생각하고 질려가며 내 말수 없음을 그저 말수 없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진 것 같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이 틀은 살아가는데 필수적이고 난 앞으로도 그 틀에 어느 정도 맞춰가겠지. 하지만 그 일을 퍼포먼스로 인지하는 건 큰 변화를 만든다. 말수 없음 뿐만 아니라 내가 단점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은 그저 나의 특성이었고 그걸 단점으로 만드는 건 사회구조라는 걸 알게 되면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일이 한결 편안해진다. 본인의 단점을 바라볼 때 그 기반에 무엇이 있는지를 인지하는 건 필수적이므로 틀 밖의 많은 사람들이 틀의 존재를 유념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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