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Hannah Höch
세심하고 민감한 사람이 좋다. 나는 아직 완전히 그렇지는 못해도 조금은 그러니까. 글을 쓰고 말을 할 때 언어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사람이 좋고 배우고 싶다. 아주 복잡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고… 어떤 사람과 이미 많은 애정을 가진 경우가 많다. 그 옆에 다가가는 게 버겁게 느껴진다. 그런 사람들이 그만한 사랑을 하는 건지 사랑으로 그렇게 되는 건지 난 모르겠다.
이제 나는 그런 체 하는 사람과 그런 사람을 판별할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런 체를 하려면 할 수도 있을 지도.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멸렬하고 귀찮다. 몇 살 어린 친구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 건 너무나도 쉽지만 그럴 때마다 가슴 깨에 연한 서먹함이 스며든다.
언어나 인문학과 거리를 둔 분야를 전공해서 그런가 주변 사람들과 비위가 다르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비위는 생각보다 중요하지만 개개인마다 너무나 다르다. 호모포빅하거나 성차별적인 농담을 하는 사람과 말을 섞을 수 있는 비위, 자본주의 속에서 희생되는 다수를 슬쩍 잊어버릴 수 있는 비위. 그건 고통의 부재에서 얻어가는 것인지 타고난 자리에서 자라나는 것인지. 내가 영영 갖지 못할 것이 이리도 부럽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 내가 말하는 비위는 전체적으로 약하거나 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누구나 비위가 약한 부분이 있고 강한 부분이 있다. 모든 리버럴을 눈송이처럼 약해 빠져서 현실세계에선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미국 남부 공화당원도 자기 종교에 대해서는 작은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에 반해 "PC함에 찌든" 나는 여러 이슈에는 민감해도 내 종교관을 욕하거나 내 나라를 욕하는 건 별 신경 안 쓰인다. 각자 비위가 다른 거지 강하고 약하고는 따로 없다. 본인이 기분 나쁜 일은 부정의고 신경 안 쓰이는 일은 자연적 현상처럼 생각하는 게 인간이다. 그 일 뒤에 제도적 차별과 피해자가 존재하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지성이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이해받는 일에서 비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일을 역겨워하는지, 더 중요하게는 어떤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지 알아감에 있어서 그 사람의 마음속 어떤 공간을 내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지도 가늠할 수 있다. 나는 그 사람의 비위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사람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가까이 내 마음 근처에 둘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내 비위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한 손에 꼽을 만큼 적고 나는 그 모두를 사랑한다. 세심하고 민감하고 나와 비슷한 비위를 가진 사람들.
그들을 만난 게 행운인 건 그들의 수가 얼마나 적은지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나와 다른 비위를 가진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단단해져 갔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내 비위가 바뀌느냐 하면은 그것도 아니다. 그저 내 비위를 잘 어르고 달래서 단단하고 따뜻한 담요 속에 넣어두는 것뿐이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어찌어찌 덜 상처 받고 살아가지만 나를 이해받으려면 그 사람이 내 비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게 참 어렵고 아쉽다. 이해에 근거해야만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나 안타까운지. 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받은 사랑은 돌아서면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 빈자리에 앉아 나오지 않는 눈물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