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에 대해서
언젠가 심리상담사가 만든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상담과 약으로 나아졌지만 금전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의 제약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담대상자 이야기를 했다. 생물학자인 호프 자렌은 자서전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서 사는 게 아니다. 아직 사막이 선인장을 죽이지 않았기에 살아있는 거다. 그래서 선인장에게 적절한 수분과 양분을 제공하면 고향인 사막에서보다 더 잘 자란다. 이처럼 생존은 적절한 환경의 지표가 되지 못하며 많은 경우에 환경은 제약으로서 작용한다. 맞지 않는 환경에서 사람은 나아질 수는 있지만 영영 괜찮지는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맞는 환경을 찾아 오래도록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종종 나아졌고 자주 나빠졌다. 한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가시가 잔뜩 박힌 선인장을 안고 아스팔트 길을 뛰어다니는 느낌이 선명하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너무나 흐린 게 견딜 수 없었지만 그걸 어떻게 할 도리도 시간도 없었다. 나중에, 어떤 시기를 지나면, 나 자신이 선명해지면 무엇이든 분명해지고 자신 있게 걸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반쯤 믿은 덕에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뒤로 한국을 떠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아주 많은 걸 느끼고 내가 점점 선명해졌다. 이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 나를 두어야 할 지도 알아가고 있다. 행복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 온전히 행복하고 자다가 자주 깨지도 않는다. 이것만으로 얼마나 큰 일인지.
나는 나아지고 있다. 그럼 이제는 괜찮은 걸까. 나아지는 일과 괜찮아지는 일은 가까워 보이지만 아득히 멀다. 나는 이제 나를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주변은 흐리다. 이제는 바닥이 여름의 아스팔트 길이 아니라 부드러운 러그일 뿐. 급류처럼 흘러가는 세상에서 나는 아직도 많은 게 헷갈리고 불안하다. 이것도 어느 시기가 지나면 선명해지고 나는 마침내 괜찮아질까. 그런 완전한 회복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 속에서 과거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도. 회복이라는 단어가 이질적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도 돌아가지 않을 것인데. 회복의 유의어들도 대부분 되돌아감을 내재한다. 우리는 한순간 완전했음을 믿는 걸까?
어쩌면 괜찮아짐은 주변의 흐리멍덩함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짐을 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흐리게 번져 보이는 세상에서 마음을 어디 두어야 할지 알아가는 것. 그게 회복의 끝일지도. 닿을 법 한 곳에 끝이 있을 수도 있는 건 생경하고... 믿기 어렵다. 이 과정은 너무나 어렵고 나는 쉽게 지친다. 자주자주 멈추고 천천히 걷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