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혼자서도 뭐든지 할 수 있다.
집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를 싸매고 여기저기 직접 다녀보고 결정해도 어려운 것인데, 나는 한국에서 해결해야 했다.
알다시피 홍콩의 집들은 매우 작다. 다닥다닥 붙어있고, 심지어는 건물이 워낙 높기 때문에 빛을 찾아볼 수 없거나 창문을 열면 바로 앞집과 인사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으로만 집을 보고 결정해야 한다는 게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가 홍콩에 도착한 8 월은 대학생들의 9 월 개강으로 인해 중국 내륙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학생들이 오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 되었다.
홍콩 한 달 살기를 하며 지냈던 호스텔조차 사람이 꽉 차서 180 만원이 넘는 돈을 내기엔 배가 앞은 장기 투숙 방밖에 남지 않았었다. 비싼 것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적어도 돈 값은 해야 하지 않는가.
결국 중국 사람들과의 치열한 경쟁에 두 손을 들고 나 역시 인터넷으로 단기로 지낼 곳을 우선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격은 200 만원 대에 육박하지만 시설만큼은 매우 쾌적한 곳에 우선 한 달을 예약하고 지내게 되었다.
5 일동안 묵었던 호텔에서 이곳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다만 캐리어를 포함해 가방만 무려 4 개가 있으니 15 분은커녕 한 시간도 걸릴 참이었다.
나는 모바일 페이나 카드 사용을 좋아하지 않아 한국에서도 배달 음식을 시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도저히 우버(한국의 카카오 택시와 비슷한 앱)를 부르지 않으면 이곳까지 와 줄 택시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신히 카드를 등록하고 홍콩 달러를 충전하였으나 이젠 가장 저렴한 일반 택시가 올 생각을 안 했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힘으로 해결해 볼까 했지만 28인치 캐리어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이런 걸로 스트레스를 받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짐은 무겁고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때의 그 서러움은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러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있다.
하여간에 결국 나는 일반 택시 가격의 두 배를 내고 우버를 불러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광동어로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던 무뚝뚝한 우버 택시 기사는 딱 봐도 외국인처럼 보이는 소녀가 짐을 들고 낑낑거리는 게 안쓰러웠는지, 호텔 직원이 트렁크에 실어준 나의 캐리어들을 인도 위에 올려주고 유유히 가실 길을 가셨다. 내 경험상 홍콩은 모든 기사들이 이렇게 짐을 싣고 내리는 것을 도와주지는 않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제 내가 지내게 될 방은 창문이 홍콩 치고는 매우 커서 베란다만큼의 크기이며, 침대도 크고 화장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다행히 수납할 곳도 많아 여기저기 신이 나서 짐을 정리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있던 살짝 병적인 정리정돈 습관을 다시 펼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가격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긴 하지만 공용 공간도 그렇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 가격이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든다.
나는 무려 8 년의 시간을 고시원에서 살았었다.
매우 작은 침대에 엄마와 함께 누워 잠을 잤으며, 방은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았다. 당연히 그럴 것이 고시원은 한 명이 지내도 비좁은 곳이다. 창문은 환풍기만큼의 크기였고, 밤낮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매우 얇은 벽 덕분에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다.
그곳에서 생활하며 나의 기본 목소리가 매우 작아졌으며, 청력도 매우 예민해져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을 견딜 수가 없어졌다. 또 매일 밤 작은 침대에서 찌그러져 잔 덕분에 어깨 한쪽이 조금 좁다.
하여간에 그렇게 작디작은 곳에서도 8 년씩이나 지낸 내가 이젠 이렇게 큰 창문과 침대가 있는 곳에서 밤과 낮을 구분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부분이 퍽 감동스럽게 다가왔다.
늘 빛을 향해 가고 싶었지만 어둠의 터널이 너무 길었다. 이제야 빛이 더욱 많은 곳으로, 어쩌면 그 긴 터널밖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얼굴이나 말투, 분위기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사실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채로 다니니 그 누구도 내가 어렵게 생활하며 컸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낀 것은,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힘듦은 어떻게든 드러나기 마련인 것 같다.
대화를 하며 말로써 드러날 수도 있지만 겉으로도, 얼굴 표정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힘들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고 그게 타인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응원의 말들을 받았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만 되도록이면 애초부터 타인에 눈에 보일 정도의 힘듦이 나에게 없었으면 한다.
오히려 내가 타인에게서 힘듦이 보일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살면서 그래도 운이 좀 좋긴 했는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몸에 피멍이 들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맞고 집에서 쫓겨나 인천에서 지내게 된 이후부터 홍콩에 도착한 지금까지는 스스로 해결해 왔다.
밤마다 걱정과 서러움에 잠이 오지 않아 아침 7 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드는 날들이 많았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세상에 혼자고, 맞은 곳은 아팠으며, 심지어 지병으로 수술까지 해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매일 왜 나의 인생은 이렇게 힘든 것인가 생각했다.
평소라면 또다시 죽고 싶다 생각했겠지만 너무 힘드니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매일 그렇게 허탈한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삶의 방향과 미래를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새벽을 보냈다.
그러다 홍콩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초기 비용을 생각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홍콩이라는 생각하나로 여기까지 차곡차곡 준비했다.
그런 힘든 시간들이 지나고 나는 지금 커튼을 열면 홍콩의 풍경이 펼쳐지는 나의 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옛 홍콩밴드 비욘드의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며칠 뒤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다.
그리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닌 듯하다. 그 누구도 모른다.
마라톤과도 같은 게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싶다.
+ 확실히 타국에 오니 고향이 그립긴 하다. 우연히 알게 된 집근처 한국 마트에서 신라면을 구입해 오늘 아침으로 끓여 먹었다. 오랫동안 잊지 못할 식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