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한국, 나의 고향. 그리고 생각치도 못한 문제.
나는 살면서 정말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받을 수 있는 충격과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넘어서자 한 가지 신기한 증상이 생겼다.
뇌가 고통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멍해지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거짓이거나 꿈이라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 증상이 처음 생겼던 것은 한 번의 시도 후 깨어났을 때인데, 그냥 모든 게 다 꿈처럼 느껴졌었다.
부서진 파편처럼 기억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손등에 매우 큰 바늘을 넣어 치료하고 있었던 게 떠올라 바로 손등을 보았고, 거즈가 붙여져 있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려운 감정이 몰려왔었다.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망했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시점에 언제든 끝낼 수도 없다. 우리는 캐릭터가 아니기에 삭제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삭제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독한 현실이라는 소리다.
나는 그 흔한 커피도 안 마시고, 술은 마셔본 적도 없으며, 흡연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늘 묻는다. 대체 커피도 안 마시고 술도 안 먹는데 어떻게 하루하루 버티냐고 말이다.
나에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아주 값진 것이 있다. 바로 악과 깡, 정신력이다.
아버지는 해병대 수색대 출신이셨다. 어떨 때는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신력이 대단했다. 나 역시도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이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제 그것에도 한계가 온 것인지, 그냥 정신력 강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인지, 위에 서술한 것 같은 증상이 생겼다. 어쩌면 한 번의 시도를 한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나는 할 만큼 한 것이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홍콩에 무사히 도착해 짐을 풀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같은 느낌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으로 넘어오기 전까지 있었던 힘들었던 순간들과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분명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도 머리가 멍하면서 지금 이게 다 꿈인가 싶다. 머리가 나 자신과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고 고개 돌려 바로 앞의 어마무시한 홍콩의 고층 아파트를 보며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저 고층 아파트가, 이제 정신을 차릴 시간이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냥 이 호텔 방문을 열고 나가면 여전히 서울이나 인천일 것만 같다.
나는 나 자신의 이러한 점이 참 마음에 안 든다. 원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는데 왜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단 말인가.
홍콩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 그냥 사는 동네처럼 느껴져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일까?
확실히 이젠 여행이나 힐링 목적이 아니고 정말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와서 그런지 느낌이 많이 다르긴 했다.
홍콩이 나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웬일로 날씨가 매우 화창했던 덕분에 제일 좋아하는 장소인 빅토리아 하버를 공항버스를 타고 오며 저 멀리 바라보았는데, 새삼 앞으로 저 풍경을 몇 번이나 보게 될까 궁금해졌다. 아무런 감흥이 없을 때까지 보게 될까? 한 달간 매일 봐도 여전히 한결같이 설렜었는데.
하여간에, 나는 어젯밤 너무 긴장을 해서 3 시간밖에 못 자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28인치 캐리어, 20인치 캐리어, 어깨가 빠질 듯한 백팩, 그리고 다리 깁스(어처구니없게도 입국 하루 전 자동차에 발가락이 깔렸다. 긴가민가한 미세골절 진단을 받았다. 이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깁스를 하고 있다.)가 담긴 가방까지. 그렇게 총 4 개의 가방을 혼자 이끌게 되었다.
공항이야 바닥이 매끄럽지만 현지에 도착해서는 체력도 고갈되어 캐리어가 밀릴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출국장에서 나를 배웅해 준 사람들을 뒤로하고 들어가려는데 왈칵 눈물이 나 버렸다.
이별은 역시 너무 어렵다. 좋든 싫든 이별은 너무 힘든 것 같다. 누군가를 떠나는 것도, 남게 되는 것도, 그냥 모두 참 싫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붙여놓으면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게 인간이라지.
비행기에 앉아서는 지난날들을 돌아보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부터 시작된 우울증, 그리고 13 년 동안이나 해외 이주를 꿈꿨다.
그 시간 동안 같이 가고자 했던 가족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명은 등을 지게 되어 나 하나 남게 되었다. 다 같이 행복을 꿈꾸었던 것과 달리 오직 홀로 행복을 현실로 만들게 된 것이다.
13 년, 참 지독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내 마음을 한국을 향해 여는 것도 참 힘들었던 것 같다.
압구정에서 바라보는 남산을 떠올리다 시장의 조금 우악스럽지만 호탕하게 웃는 아주머니들을 떠올리고, 아주머니들을 떠올리다 여전히 매일 같은 시간에 스님들과 함께 저녁 기도를 하고 계실 절의 노보살님들을 떠올린다.
내가 없어도 여전히 사람이 많을 여의도 공원, 여전히 열심히 회사에 다닐 나의 친구들, 오늘도 그저 놀고 싶어 집안을 뛰어다닐 어린 비숑, 오늘도 노을 아래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을 1호선.
이 모든 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나는, 어쩌면 그저 한국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거절 당해 슬펐던 게 아닐까?
내 고향 서울, 당연히 나는 서울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한국에만 살면서 그저 주변 친구들이 살아가는 대로, 그렇게 삶에 대한 의문 없이 그저 살아가기만 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한국에서 일하며 잘 살아가고 있었을까?
참 많은 생각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원섭섭했다.
13 년 동안이나 꿈꿔왔던 것이, 내가 좋아하는 나라에서 현실이 되었다.
지긋지긋한 우울증도 이제 막을 내릴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또 났던 것 같다.
새삼 이제 언제 한국에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두려운 것 같긴 하다.
해외여행을 왔다가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가면 불안장애가 와서 힘들었었는데, 이젠 한국으로 가는 길이 반갑고 행복하게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한 번쯤은 진심으로 한국을 좋아해 보고 싶다.
확실히 홍콩은 한국에 비하면 매우 습하고, 덥고, 절대 깨끗하지 않다.
식당에 가면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직원들은 어디에든 있고, 내가 적응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알고도 왔으니 이제 씩씩하게 적응하며 삶의 노하우를 익히는 일만 남았다.
다만 벌써부터 실내 에어컨이 너무 추워서 고민이다.
괜스레 두려움이 몰려와 KBS 월드 채널을 돌려놨다.
그나저나 나는 혼자 있으면 티비, 불을 모두 켜놔야 겨우 잘 수 있는데...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