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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쪽지 Mar 26. 2020

불편함의 서막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자꾸만 먹다 보면 탈이 나기 쉬워요.

나와 다른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단 한 가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나이가 적든, 많든, 나와 성향이 비슷하든 아니든 간에 내가 이해하는 부분을 함께 이해하고 공감해주길 바란다. 머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행동으로 내비치지는 못하는 것처럼, 모두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를 뼛속 깊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어쩌면 이해조차 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참 아이런 하지 않는가. 상대는 내 모든 걸 이해해주길 바라면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겨난다는 것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죽어라 맞춰도 맞지 않는 단추가 있고, 대충 끼워도 얼추 들어맞는 퍼즐도 있다. 애쓰고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관계는 서로를 힘들게만 할 뿐이고 결국은 멀어지게 된다. 상처만 덥수룩하게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쉽게 바뀌지 않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중심이 ‘나’에게 있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가 갖는 관점의 대부분은 '나'로부터 나온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너는 왜 네 생각만 해?"


라는 말을 쉽게 내뱉곤 하지만 정작 나 또한 그런 이기적인 사람일 때가 많다. 관점은 나로 두면서 상대에게 말할 때는 '너' '너는 왜'라는 물음표를 자주 붙이곤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대에게 미운 감정이 생겨나는 순간,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 내 관점에서, 내 가치관에서 판 갈음이 나는 거다.


“내가 만난 사람은 똥차였는데, 그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는 벤츠였어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나와는 결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고,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다. 모든 관계는 상대적인 데다가 절반은 타이밍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중 일부가 틀어져도 전부가 무너져버리는 사달이 난다. 굽히거나 굽히지 않거나, 맞거나 맞지 않는 건 그 상대성이 무너진 것으로 보기 쉽다. 보이지 않는 틀을 서로가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원망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사랑하는 관계도 있지만 그 사람 역시 어느 순간은 사랑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는 '내가 왜 태어났을까.' 하는 존재의 이유보다도 '우린 왜 자꾸 맞지 않을까.' 하는 상태의 의문을 더 많이 던지곤 했다.


살면서 정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관계가 있다.

삶은 결코 완벽할 수 없기에 불완전한 타인과 미완의 내가 모여 편안한 것보다는 불편함을 이룰 때가 많다.

이 모든 관계에 안부를 붙인다.


사랑했던, 그렇지 않았든 간에 나를 스쳤던 모든 타인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




연재는 매주 일요일마다 진행할 예정입니다.
내가 살면서 가진 모든 미움을 갖고 읽어주세요.   
읽고 나서는 그 모든 미움을 던져버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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