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윤, 고백

길을 걷고 있을 때

by 브레첼리나

12월이 지나 1월을 맞이하는 이 시기가 되면, 나는 늘 2012년 겨울에 걸었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떠올린다. 추운 계절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길이 자연스레 눈앞에 펼쳐진다. 햇빛이 쨍하게 내려앉은 햇살 속을 걸은 날도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걸은 날도 있었다. 겨울의 산티아고 길은 한적하다고 한다. 문을 닫은 알베르기(숙소)도 많아,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들 대신 스페인 현지인과 몇몇 유럽 사람들만이 길을 공유했다. 나는 겨울의 산티아고 길만을 걸어봤기에, 방송에서 보았던 봄이나 가을의 산티아고 풍경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진다.

독일에 온 지 2년째 되던 해, 독일어 시험을 마치고 잠시 시간이 생겨 산티아고 길을 걷게 되었다. 산티아고 성당이 있는 고지를 열흘 남짓 앞두고, 나에게 하나의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었다. 마음이 크게 요동쳐 걷고 있던 이 길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길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에, 나는 우선 목적지까지 걷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상태로 크리스마스를 지나 연말과 연초를 맞이했다. 하루에 정해둔 거리를 걷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정리를 하고 나면, 내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근처 성당에 가 그저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다음 날 아침이 오면 다시 마음을 다잡고, 걷는 일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길 위에서 위기는 늘 고지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찾아온다. 하루에 20~25km를 걷다 보면 도착 5km 전쯤부터 몸도 마음도 급격히 지쳐간다. 그러면 자연스레 앞을 보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며 걷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진다. 그때 나에게 다시 힘을 건네준 것은 음악이었다.

내가 들었던 음악은 조깅할 때 듣는 활기찬 노래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조용한 곡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힘이 되어준 노래가 박지윤 8집에 수록된 <고백>이었다. 박지윤의 목소리와 음악은 마치 당시의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하고 싶었지만 꺼내지 못했던 말을,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것 같아 큰 위로를 받았다. 무엇보다 내가 걷고 있던 풍경과도 잘 어울렸다. 회색 하늘 아래 눈이 쌓인 마을을 지나, 탁 트인 쓸쓸한 길을 걷고 있을 때 박지윤의 음악은 힘겨운 마음을 잠시나마 잊고 견디게 해주었다.

잿빛 하늘과 차가운 겨울 속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2012년의 산티아고 길을 떠올린다. 그때 너무도 힘들어하던 나를, 지금의 나는 참으로 안쓰럽게 바라보며 안아주고 싶어진다. 그 누구도 만져줄 수 없었던 내 마음을 박지윤의 목소리와 노래로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에, 조용히 고마움을 느낀다.


https://www.youtube.com/watch?v=8lerbOh7z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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