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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Oct 04. 2024

어느 고양이의 다섯 번째 추석

사실은 고양이가 아니라 집사의 추석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꽃이 막 피기 시작한 4월에 지금 회사에 이직했는데, 여름 내내 회사 일과 출간 작업을 병행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추석이 코앞이었고, 그 추석 연휴마저 끝난 지금 돌이켜보니 올봄, 회사 근처 경복궁이며 정독도서관에 점심시간마다 꽃구경을 다닌 건 전생의 기억 같다. 왠지 다음에 정신이 들면 설 연휴를 앞두고 있을 것만 같아서 여명이와 함께 보냈던 추석 이야기를 조금 남겨볼까 한다.

정독도서관에서 벚꽃뷰 점심식사

올해는 여명이와 함께 보낸 다섯 번째 추석이었다. 여명이를 임보하던 2020년 추석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명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나는 본가에 날마다 출퇴근을 하며 명절을 지냈다. 내 분리불안이 심각해서 여명이는 만 4살을 넘기는 동안 혼자서 자본 적이 없다. 그동안 내 모든 여행은 당일치기였고, 명절에는 본가에 출퇴근을 했다.

난 안 가!(표독)

딱 한 번, 설 연휴에 여명이를 데리고 본가에 간 적이 있는데 그 후로 가족들이 나서서 여명이는 집에 두고 내가 출퇴근하는 걸로 정리했다. 왜냐하면 그 핵쫄보가 낮에는 침대 밑에만 있다가 식구들이 다 자는 밤에만 기어 나와서 망나니처럼 뛰어놀았기 때문. 그래서 이번 추석에도 나는 아침에 부모님 댁에 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짓을 연휴 내내 반복했다. 그나마 같은 구에 있어서 할만했지만, 그래도 매일 회사에 출퇴근하는 느낌이라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하루 정도는 혼자 재워볼까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저녁쯤 되면 내가 초조해서 먼저 집으로 가는 버스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설에는 어디든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 추석은 회사 밖에서 맞게 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안정적인 회사에서 맞이한 이번 추석은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이번 회사는 일이 지나치게 편하고 자유 시간이 많은 대신 월급도 적지만, 처음으로 제법 큰 단위의 명절 상여금을 받았고 그와 별개로 사장님이 따로 챙겨주는 선물도 받아서 부족하게 느껴지던 월급이 어느 정도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내 선물은?

그리고 또 하나, 이번 추석에는 직장인이 아닌 작가로서 받은 선물들도 있었다. 9월 초에 무사히 출간 작업을 마치고 나서는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담당 PD님한테 연락이 와서 봤더니 추석 인사와 함께 선물을 보낸다고 해서 놀랐다. 권 수로는 다섯 권, 200자 원고지로 3천 장을 조금 넘긴 분량의 소설을 책으로 함께 완성해 나가는 동안, 이런 작업이 처음인 나는 누군가의 첫 소설을 발견해 손을 대고 만 PD님에게 어떤 전우애 같은 걸 느꼈다. 명절 인사 메일을 읽으며 그게 나 혼자만의 감정은 아니었구나, 하며 마음이 따뜻해졌고, 이제 막 첫 책을 출간한 햇병아리까지 챙겨주셔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감동한 만큼 여명이도 선물에 붙어있던 노리개 장식에 감동한 것 같았다.

노리개에 크게 감동한 여명이

실은 책이 출간되기 전날, 오랜만에 긴장이 돼서 잠을 못 이뤘다. 완결까지 무료 연재를 진행하기도 했고, 전작도 없는 완전 생신인의 소설이라서 하나도 안 팔리면 어쩌나 심란했다. 나 혼자 민망하고 말 일이면 다행인데, 내 소설을 발굴해서 출간까지 애써준 담당 PD님이 매출 부진으로 곤란해지면 어쩌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제발 별점이 아무리 낮아도 좋고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누구라도 내 소설을 읽고 별점을 달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애써 잠을 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전자책 플랫폼에 내 책이 팔리기 시작하자 무료 연재로 이미 완결까지 다 읽은 독자들이 책을 사고, 별점을 주고, 무료 연재 때부터 재미있게 봤다며 응원하는 댓글까지 달아준 걸 보고 크게 감동했다.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글자도 모르는 여명이를 무릎에 앉히고 새로운 댓글이 달릴 때마다, 별점이 추가될 때마다 이것 좀 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지긋지긋...

여명이와 함께 보낸 다섯 번의 추석이 매번 즐겁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어느 때는 만족스럽지 못한 회사에 다녀서 평범하게 괴로웠고, 어느 때는 직장을 다시 구할 수 있을지 불안했고, 어느 때는 합격한 회사에 갈까 말까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던 때도 있었다. 이번 추석에도 괴로운 일 한두 가지는 있었지만, 그것들이 다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이렇게 내 상황과 기분이 널을 뛰는 동안에도 여명이는 흔들림 없이 칸트 고양이답게 자기만의 루틴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놓이고, 쉽지는 않겠지만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나름 추석빔

글을 써서 번 돈으로 여명이의 추석빔을 샀다. 옷은 질색하는 고양이라서 목에 두르는 고운 색동 목도리를 샀는데, 톤 파괴자(하얀 면적 넓은 고양이의 장점)답게 색동도 잘 어울렸다. 싫어하면 금방 벗기려고 지켜봤는데 여명이는 생각보다 그 목도리를 좋아했다. 목도리를 감고 잠까지 자는 여명이를 보면서 설에는 더 예쁜 설빔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계속 뼈대만 세우고 있는 소설을 이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여명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야기 하나를 완성해 봤으니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10월 중으로 브런치에서 연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니 그동안 여명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던 분들이 이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다.(강요)

정말 뻔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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