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도 터지고 고양이 속도 터지고
2022년 여름에 첫 이사를 마친 쫄보 고양이 여명이는 한동안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느라 애를 썼다. 처음에는 다시 원래 집에 가자고 그렇게 울어서 걱정했는데, 천천히 그럭저럭 조금씩 적응하더니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는 원래 이 집에서 태어난 고양이처럼 자연스럽게 잘 지내는 걸 보고 나도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그 가을 여명이에게는 큰 위기가 한번 찾아왔다.
10월 어느 날 주말 외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불꽃축제를 하는지 폭죽 터지는 소리가 건물 근처에서부터 꽤 크게 들렸다. 집에 혼자 있는 쫄보 고양이가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디에 꼭꼭 숨었는지 늘 나오던 마중을 안 나왔다. 자주 숨는 공간들을 하나씩 찾아봤는데도 코빼기도 안 보여서 얘가 도대체 어딜 갔나 슬슬 초조해하던 중에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 소리가 아주 약하게 들렸다.
한 번도 숨어본 적 없는 변기 뒤편에서 애처롭게 울고 있는 걸 보니까 짠하기도 한데 웃기기도 해서 달래주는 동안 자꾸 슬슬 웃는 바람에 같이 집에 돌아왔던 동생한테 잔소리를 들었다. 한참 달래줘도 나올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는 화장실에서 곧바로 나왔는데, 동생은 아예 여명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계속 달래주고 있었다.
거실로 나왔더니 조금 멀기는 해도 불꽃 축제가 생각보다 잘 보여서 화장실에 있는 동생한테 나와서 구경 좀 하라고 했다가 다시 잔소리를 들었다. 지금 여명이가 넋이라도 있고 없고 상태로 숨어있는데 불꽃이 눈에 들어오냐는데, 눈에 안 들어올 건 또 뭐야...(눈치)
동생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여명이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명이를 달래던 동생도 나중에는 다리가 저리다며 거실로 나와서 같이 불꽃 축제를 구경했다. 누나들이 거실에서 뭘 재미있게 하고 있으면 여명이도 곧 나오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는데 어림없었다.
30분쯤 지나니까 이제 마음이 살짝 놓였는지 변기 뒤편에서 몸을 조금 꺼내기는 했는데 여전히 여명이는 많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람인 내가 듣기에도 쿵쿵 소리가 제법 컸으니 여명이한테는 오죽할까 싶어서 일단은 무리하게 데리고 나오지 않고 그냥 둬봤다. 언젠가는 나오겠지.
그런데 곧 나올 줄 알았던 여명이는 불꽃 축제가 끝나고 나서도 한 20분 정도 화장실에서 바깥 상황을 살폈다. 이제 누나들 화장실 쓰게 너 좀 나가라고 엉덩이를 밀어주니까 그제야 마지못해 주춤주춤 나가더니 화장실 문 앞에 한참 앉아있었다.
불꽃 축제의 여파로 여명이는 한동안 큰 소리가 나면 평소보다 훨씬 더 긴장했다. 가끔 블랙이글스 훈련이 있을 때도 소리가 들리는데, 불꽃 축제보다 훨씬 작게 들리는데도 여명이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에 숨어서 조용해질 때까지 안 나온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불꽃 축제의 충격을 슬슬 잊어갈 때쯤 다음 불꽃 축제가 시작되었다.
조금 더 화려해진 불꽃이 터지는 동안 여명이 속도 터졌다. 이때는 여명이 혼자 집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화장실까지 가서 숨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불편해죽겠다는 우우웅, 소리를 내면서 숨을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내가 담요를 둘러서 만들어준 요새에 잠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자꾸 무너져서 그런지 불안해하다가, 결국 못 참고 여명이는 낮은 포복으로 번개같이 거실에서 방으로 숨으러 뛰어갔다.
행거 아래에 자리를 잡더니 그제야 좀 안정이 되는지 나름 그루밍도 하고 좀 편한 자세로 있었다. 확실히 두 번째는 그래도 좀 수월한가 보다 하며 나도 여명이 걱정을 덜고 불꽃 구경을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했다.
그리고 올해. 일주일 전부터 출근길에 교통통제 안내가 붙어있는 걸 보고 곧 불꽃 축제가 시작된다는 걸 알았다. 이번에는 세 번째니까 그렇게까지 긴장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와 그래도 저 쫄보를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불안을 동시에 안고 당일을 기다렸다.
내가 빨래를 걷어놓으면 항상 그 위에 올라가서 털을 붙이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여명이는 그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건조대에서 걷은 내 옷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못 들었는데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장 행거로 도망을 갔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왜 그래? 하자마자 내 귀에도 쿵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감각이 인간보다 더 예민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인간 평균보다 둔해서 그런지) 여명이는 항상 나보다 반응이 빠르다. 이번에도 불꽃은 화려하고 예뻤지만, 소리도 엄청났다. 우리 건물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불꽃 축제 시작부터 끝까지 멎지 않는 걸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 싶어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여명이는 이번에도 숨을 장소로 행거 아래를 골랐다. 상태를 살피러 갔더니 첫해처럼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저건 왜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또 오냐는 짜증이 섞인 표정이라서 보고 좀 웃었다. 그래도 지난 경험으로 이제는 저런 소리가 나다가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올해는 좀 덜 당황한 것 같았다.
심지어 거실에 나와서 아주 잠깐이지만 불꽃 구경을 하다가 다시 숨기도 해서 박수도 쳐줬다. 다음 불꽃 축제 때는 내 옆에 편하게 앉아서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을 하면서도 아마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불꽃이 터질 때마다 저렇게 긴장하고 숨는 걸 보면서 고양이용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이 있으면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이과가 만들어줬으면...(뻔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