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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Dec 08. 2023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서라고요?下

합격과 탈락 그 사이 어딘가

'경험은 무조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여!'


뭐든지 많이 겪어보고 부딪히면서 살라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았다. 하고 후회 안 하고 후회 중에서는 무조건 하고 후회인 나란 사람. 실패한 경험이 될지라도 나중에 술자리에서 무용담으로 풀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면, 그 무용담으로 술자리의 왕이 될 수 있다면 이긴 거라는 생각으로 어떤 일이던 들이대보면서 살아왔다. 바르셀로나에서 한 달 살아보기, 물공포증을 딛고 수영 배우기, 배낭 하나 메고 무계획으로 프라하에 가기, 뮤직비디오 촬영 기법 배우기, 비트 메이킹 배우기, 포르투갈의 공동묘지 가보기, 창업 도전하기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았다. 지금 하라고 하면 아마 저 중에 반도 못할 거다. 그 시절의 무모함이 있었기에 서른이 넘은 지금 20대의 추억이 풍요로워졌다. 


새로운 일 혹은 경험에 대한 심리적인 허들이 낮은 어른이 되었다. 나의 자부심인 도망치지 않음을 무기로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힘을 쏟아보자 생각했다. 심사에 어떤 점수가 많이 들어가는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준비 20점, 워킹 20점, 포즈 30점, 자태 20점, 표정 10점으로 포즈가 가장 중요한 심사요인이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포즈를 죽도록 연습해야겠구나! 단기 속성으로 A와 함께 포즈 연습에 들어갔다. 


"아니 아니, 고개를 그렇게 쳐 올리지를 말라고!"


"내가 고개를 올린다고? 그럴 리 없어!"


나름대로 최대한 조선시대 아기씨 같은 자태로 포즈를 취했는데 그놈의 턱주가리가 왜 이렇게 자기주장을 하면서 올라가는지. 한 시간을 포즈 잡고, 워킹하면서 힘을 쏟았더니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그때의 날씨는 33도를 웃돌고 있었다.


대회까지 며칠을 앞두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준비를 어떻게 해가지? 궁금한 마음에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는데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헤어와 메이크업을 샵에서 받고 온다는 것이다. 헤어, 메이크업을 받는 것만 못해도 20만 원은 더 들게 된다. 거기에 필요한 사람은 한복대여까지 한다는데 한복 대여는 1회에 50만 원을 웃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금액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들은 이렇게까지 큰돈을 써가면서 이 대회를 준비한다고? 놀랄 노자였다. 헤어, 메이크업, 화려한 한복 그 어떤 것도 심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나만 질 수 없는 노릇이잖아? 의욕은 앞서지만 그러기엔 주머니 사정이 여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난 셀프로 다 조진다! 는 마인드였다. 10년 넘게 화장하고 머리 만진 짬바가 있는데. 이 정도 못하겠어? 철면피로 모든 걸 셀프로 준비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대회가 열렸다. 다만 내가 그걸 본 것은 이미 지역예선이 모두 마감된 이후여서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서울 예선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내년이 되면 분명 겁나서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먼 길이지만 강행을 하게 된 것이다. 새벽부터 얼마나 바지런을 떨었는지 모른다. 나만 뒤처지면 안 되니 헤어와 메이크업을 오늘 결혼하는 사람처럼 공들여서 했다. 이 정도면 당장 신부입장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나저나 서울까지는 어떻게 가지? 기차를 타자. 아니야 기차는 지연되는 일이 잦으니 버스를 타자. 그쪽이 안전하겠다. 버스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서 택시를 타면 딱 이겠구나. 그 덕에 대회시작 1시간도 전에 도착을 했다. 하나 둘 참가자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간담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시바.. 내가 튀긴 튀는구나.'


그 안에 몇 명이나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100명? 200명? 그냥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 안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신부대기실 그 자체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공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진다고 한들 자본의 손길이 닿은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신부대기실 사이에서는 중전도 몇몇 보였다. 가채까지 쓰고 온 것인데 가채 쓴 사람 옆에 있으니 무수리도 이런 무수리가 없었다. 중전보다 무수리 같은 내가 더 튀어 보였다. 15만 원이고 나발이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도 일찍 도착한 덕을 보긴 했다. 선착순으로 골라잡는 한복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었다. 환복 한 이후에는 간단한 워킹 연습을 하고 곧바로 리허설에 들어간다. 리허설을 한 5-6번 정도 할 수 있는데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 한복을 입은 채 걷고, 포즈를 취하고, 걸음수를 익힐 수 있는 타이밍이다. 이때 사진 찍느라 바쁜 참가자들도 있다. 추가금을 내면 화보를 찍어주는데 화보 찍느라 리허설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죽어라 리허설을 했다. 왜냐.. 내 15만 원을 알뜰살뜰 써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긴치마를 입고 걸어보지 않은 탓에 치마가 자꾸 발에 걸렸다. 이거 빠른 시간에 적응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일단 이 시간에 집중하자. 한복 안에서는 땀이 삐질거리며 나오고 있었지만 리허설을 멈추지 않았다. 한 명씩 자세를 잡아주는데 빠졌던 어깨가 다시 빠질 것처럼 후 달렸다. 어깨를 이렇게까지 젖히라고요? 팔까지 달달 떨렸지만 어쩌겠는가. 꾹 참았다. 그렇게 몇 분 뒤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클럽 같은 조명을 켜고 EDM사운드가 심장을 빵빵 울리면서 대회가 시작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준비한 것만 다 하고 내려오자! 최대한 곱게 연습한 것만 집중해서 무대에 올라섰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주목받기 싫어 병, 나서기 싫어 병 말기 환자인데 무대가 그렇게까지 떨리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서 한 포즈, 한 포즈 사진 찍듯이 최대한 공들여했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터덜터덜.. 내려오는 순간 알았다. 탈락이구나. 말할 것도 없이 탈락한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무슨 인증서 같은 걸 받고 한복을 반납 후 그냥 집으로 가면 된다. 이 짧은 무대를 위해 그렇게나 땀을 흘렸구나 싶었다. 연극배우나 가수들의 노고를 개미 오줌만큼은 이해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고깃집을 갔다. 지글지글 잘 구워진 고기를 한 입 베어무니 좀 살 것 같았다. 반타작이나 했으려나. 100점 만점일 테니 50점만이라도 받았으면 최소한 쪽팔리지는 않겠지. 목살을 왕왕 씹으면서 생각했다.


며칠 뒤 결과가 문자로 발송된다. 변수는 없었다. 탈락이었다. 모든 대회가 끝이 난 뒤 점수를 열람할 수 있다 하여 몇 점이나 받았는지 궁금한 마음에 내 점수를 확인해 보았다. 100점 만점에 90점이 커트라인인데 내 점수는... 88.55점이었다.


"..."

"나 지금 1.45점 부족해서 떨어진 거니..?"


진짜 할 말을 잃었다.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간발의 차이로 탈락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에서 1.45점은 합격에 발을 살짝 담근 점수였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경험해 본 걸로 만족이었던 내 도전은 합격의 문지방을 살짝 밟았다가 뗀 것으로 끝난 것이다. 당연히 반타작도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점수에 넋이 나가버렸다. 저녁나절을 어딘지 모를 억울함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번 경험은 합격 언저리의 맛을 봤으니 나에게 유의미한 경험이 되어주었긴 했다. 물론 좀 더 연습을 할걸 하는 후회를 남기긴 했지만 말이다. 


죽도록 어려울 것 같은 일들이 있다. 하지만 막상 들이받아보면 '생각보다 별 일 아니었네?'싶은 것들도 꽤나 많다. 난 내가 무대에서 별로 떨지 않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바들바들거릴 줄 알았는데 연습한 대로만 착착하고 내려오는 자신을 보고 그 순간엔 대견하다 싶었다. 어쩌면 무대가 체질인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아주 잠시 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이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들과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을 15만 원이라는 저렴한 금액에 구매했다. 결과적으로는 탈락이지만 술자리 썰 풀기 왕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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