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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Dec 25. 2023

일기에 대하여.

일기를 대하는 나의 자세, 일기 쓰는 방법

학교 다닐 때 일기 쓰는 숙제 싫어해본 사람 손 한번 들어보실래요? 일단 저는 들었습니다. 도대체 일기를 왜 매일 써야 하는지 그걸 다른 사람한테 검사를 받아서 도장까지 찍어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날씨가 맑았는지 흐렸는지 구태여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일기라는 건 나 자신과의 소통창구인데 왜 선생님한테 그걸 검사받아야 하는 거지? 가장 미스터리였다. 누구나 일기를 몰아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방학 때 매일 꼬박꼬박 일기 쓰는 초등학생이 몇이나 되겠냐는 말이다. 일기를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이였다. 그런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일기에 중독되어 버렸다.


처음 시작은 첫 취업을 하고 나서였다. 22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취업을 해서 타지 생활을 했다. 인생의 첫 직장은 산골짜기 깊은 곳의 골프장이었는데 유달리 마음이 빈곤한 사람들이 많은 집단이었다. 한 1년 근무하면서 별의 별일을 겪었다. 10년도 넘은 지금 다시 생각을 해봐도 첫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튼 좀 이상했다. 그때부터 나는 일기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부디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멀쩡히 집으로 가게 해 주소서. 아멘. 같은 느낌이었다.(본인 무교임)


당시에 유일한 탈출구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펜으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일기를 쓰고 있으면 종이 위에서 펜이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일기에 쏟아내고 나면 가슴이 후련했다. 그렇게 버텨내는 삶을 일기에서 배웠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쓰고 토해내듯 감정을 정리하며 나를 다독였다. 당시의 일기를 펼쳐보면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뽀시래기에게 애쓰지 말라고 꽉 끌어안아주고 싶다. 그래서 예전 일기를 잘 들춰보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기분이라서.


일기의 기술


일기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일기를 쓰는 방법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어렵다. 처음 시작하면 오늘 날씨, 먹은 것, 만난 사람 뭐 이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달리 내 생각 같은 것이 쉽게 바깥으로 꺼내지지 않는다. 내가 나를 3자의 시선으로 관찰할 줄 알아야 속내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는 게 어렵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그렇게 두 세줄 정도로 짧게 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건 속의 내가 보이게 된다. 관찰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때 다시 한번 난관이 찾아온다. '여기서 내가 얼마나 솔직해야 하지?'


일기짬바 10년이 넘은 지금도 키보드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이 많다. 내가 지금 이 감정을 온전히 적는 게 맞을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적는 게 맞을까? 있는 그대로 써버리면 내가 너무 초라한데. 어떡하지. 정말 웃기지 않은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건 담임 선생님한테 검사를 받아야 하는 일기가 아니다. 어차피 나 혼자만 쓰고 나 혼자만 보는, 그나마도 예전 일기를 잘 들춰보지도 않는데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이러니이긴 한데 우습게도 사람은 혼자만 보는 일기에서도 얼마큼 솔직해야 할지 저울질을 한다. 현재 느끼는 '찌질한 모습의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대담한 나'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해 글자로 옮긴 적이 있다. 놀랍게도 나중에 다시 보면 모든 감정들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끝없이 가늠질을 하던 순간까지도.


일기는 나와의 필담이다. 나와 나누는 대화라는 이야기이다. 일기에 있어서는 최대한 솔직하게 털어놔야 한다. 글자 속에서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버리고 그냥 모니터를 꺼버려야 한다. 일기에 꾸며진 나를 써버린다? 나중에 쿨한 척하는 나를 보며 수치심을 곱빼기로 돌려받게 된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써..


편지의 기술


사실 여기까지는 마음이 힘들 때 쓰는 일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기를 꼭 힘들 때 해우소 느낌으로 사용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가끔 너무 기분 좋은 일이 있거나 행복이 살갗으로 와닿는 희귀한 경험을 할 때마다 나에게 편지를 써둔다. 근데 이건 너무 희귀한 일이라 거의 하지 못한다는 슬픈 단점이 있다. 아무튼 행복 편지는 이런 식으로 쓴다. '오늘 이만저만해서 너무 기쁘고 행복했는데 삶이 힘들 땐 이 순간을 기억하렴~'의 바이브로 적어둔다. 여기서는 감정을 왜곡하거나 미화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한다. 너무 행복한 상태이니까! 그리고 편지를 잠가둔다. 아무 때나 읽지 못하도록. 그러다 정말 힘든 어떤 순간에 편지를 열어본다. 거기서 오는 위로가 너무나도 강력하다. 내가 이렇게나 긍정적인 사람이었는데!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 거였어. 하마터면 가스라이팅 당할 뻔. 뿌에엥 하고 눈물이 난다. 너무 청승맞아 보이지만 정말 그랬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아날로그 방식은 아예 접어버렸다. 블로그에만 일기를 기록한다. 아날로그 방식을 접은 이유 1번은 손글씨가 타이핑만큼 빠르게 내 생각을 따라오질 못해서이고 2번은 나중에 키워드로 찾아보려고 블로그를 애용한다. 그러나 어지간하면 이전 글들을 잘 들춰보지 않는다. 아직도 당시의 나를 다시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인가 보다. 


나라고 매일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는 것은 아니다. 길면 2주에서 한 달간 일기를 손 놓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6개월간은 나를 빠짐없이 기록해 보자는 취지로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 정제된 언어로 속 안의 부유물들을 싹 다 털어내고 잠에 드니 마음이 한 결 편해진 기분이라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이제는 하루라도 빼먹는 날이 있으면 굉장히 찝찝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는 지경이다. 이거야말로 일기의 순기능이 아니냔 말이다! 별 게 없는 하루였는데도 쓰다 보면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일기는 별 거 없는 하루를 별 거로 만드는 특별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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