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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Dec 24. 2023

절대적인 1번

추억의 힘 혹은 흐린 눈

누구나 '나'라는 사람을 에워싸는 수식어들이 다양할 것이다. 회사에서는 00 씨 혹은 대리님, 집에서는 딸, 글을 쓸 때는 작가님 등이 있을 수 있겠다. 그중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수식어는 누군가의 '친구'였다. 친구로서의 나 자신이 좋았고 그에게 친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숨 쉴 수 있음이 좋았다. 


친구를 분류할 때는 보통 만난 시기 혹은 공간에 따라 나뉜다. 고등학교 때 만났는지 대학교에서 만났는지 직장에서 만났는지에 따라 느껴지는 감상 같은 것들이 미묘하게 다르다. 확실히 어느 정도 가치관이 자리 잡은 상태, 즉 20대 때 만난 친구는 어느 정도 취사선택이라는 게 가능하다. 내가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경우에만 이어간다는 뜻이다. 연락이 뜸해지면 그런가 보다 하고 암묵적으로 그냥 넘어가 버린다. 그러나 10대 때 만난 친구들은 다르다. 고등학교의 야간자율학습, 즉 '야자'라는 시스템 안에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하루 종일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부대끼며 3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에 만난 친구들은 가족 이상의 어떤 끈끈함 같은 것으로 연대가 되어있고 20대가 되어서도 쉽게 끊어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친구는 평생 친구'라는 말을 누구나 한 번쯤을 들어봤을 것이다. 정말이다. 사회에 나와보고 여러 사람들을 겪어 봤지만 고등학교 친구는 쉽게 끊어낼 수가 없다. 연락이 아무리 드문드문 해진다고 해도 끊어지지는 않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이미 너무 긴 시간을 서로의 서로의 삶 속에 부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나면 별 다른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추억 얘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요즘 근황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간단히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추억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이다. 한번 자리 잡은 생각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때문에 머리가 커짐에 따라 사람의 생각이 변하기도 하고 아예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 웃긴 것은 서로가 이제 삶을 바라보는 각자만의 시각이 생겼음을 알고, 그것이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끌어안고 간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절대 이어갈 수 없는 인연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흐린 눈을 해버린다.


여러 복잡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친구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들이 있었다. 머리가 아무리 커지고 세상이 나를 변하게 한다 해도 절대 변하지 않을 불변의 진리. 친구가 나의 1번이고, 내가 그의 1번이라는 사실. 이게 나를 움직이던 때가 있었다. 난 그 시절의 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누군가를 그렇게나 맹목적으로 우정 할 수 있는 시기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렇게 절절한 우정을 다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올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이제는 그러기 어려울 것이라는 답이 나온다. 서로의 다름을 알고도 절대 끊어낼 수 없는, 영화처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그들을 너무 사랑했다. 이래서 너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을 함께한 친구는 무섭다. 추억이 가진 힘이 너무 세다. 


시간이 훌쩍 지난 이제는 내가 그들의 1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삶 속에 1번으로 둘 수 있는 무수한 다른 존재들이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기 때문이다. 친구는 자연스레 뒷번호로 밀려나게 된다. 처음엔 내가 1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을 해보면 나 역시 똑같다. 나라고 뭐 다를 것이 있겠는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이 후순위로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쌤쌤인 것이다. 나는 좀 쪼잔한 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 이면서 그의 삶에서 내가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먼저 방을 빼버리는 쪽을 택했다. 나도 원래부터 네가 1번이 아니었거든? 이런 유치 찬란한 바이브였다. 고백하건대 그들의 삶 안에서 나의 존재가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 두렵고 슬펐다. 그래서 저런 옹졸한 마인드로 일관을 해버렸다. 그 시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위안을 해본다. 


친구란 대체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느 순간에는 1번이고 어느 순간엔 끝번인 그들을. 훨훨 날아가는 연이 있다. 너무 멀리까지 날아가서 이대로는 연줄이 끊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연줄이 탁-하고 끊어질 즈음 휘리릭 감아 버린다. 연이 다시 가까이로 오고 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연줄 같다. 이러다 다시 서로의 1번이 되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게 아니어도 뭐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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