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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Dec 28. 2023

2018 독감일지

독감이 나에게 알려준 것

요즘 어느 동네 아무 병원에 가도 대기가 1시간은 기본이다. 1시간만 기다리는 거면 운이 좋은 편일 지경이다. 독감과 감기에 코로나까지 겹치는 시즌이 한참 진행 중인지라 병원은 아마도 떼돈을 벌지 않을까 싶다. 현재로서 최선의 방법은 마스크를 잘 끼고 아프지 않는것이다. 몸 상하고 마음 상하고 돈까지 나가버리면 정말 삼중으로 속이 상한다. 아마 나에게 살면서 언제 가장 아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언컨대 2018년의 독감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올겨울 부디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때의 기록들을 살펴본다. 아파 죽을 것 같아도 기록을 멈추지 않은 나. 기록에 미친 사람이었고 지금도 미친 자이다. 


1일 차


새벽에 근육통으로 여러 번 깨고 뒤척임. 열이 많이 나고 근육통에 몸을 가누기 힘듦. 병원에 가서 독감 검사를 받았는데 음성 나옴. 추가 금액 없이 한번 더함. 음성 나옴. 독감 검사가 그렇게 불편한 작업인지 몰랐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기다란 면봉이 입으로 나온다. 두 번의 검사 결과 둘 다 음성으로 나왔고 의사 선생님은 발병 초기엔 안 나오는 경우가 있다면서 내일 한번 다시 검사해 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조퇴했다. 동료들의 진심 어린 걱정에 눈물이 날 뻔했다. 연차 없다니까 당신 연차를 주겠다며 쉬라 하시는 그 마음이란.


2일 차


어제 조퇴하고 집에 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자는데 내 끙끙 거리는 소리에 놀래서 잠에서 깼다. 근육통은 조금 덜하지만 여전히 아프고 열이 계속 났다. 눈뜨자마자 병원으로 갔고 약 40분 정도 기다리다 다시 독감 검사를 받았다. 버스 타고 가는데 기운이 1도 없었다. 그냥 순간이동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독감 검사 3번 한 사람은 나뿐일 듯싶다. 결국 양성 판정이 나왔다. 오늘은 근육통은 덜하다. 현재 타미플루 2개 먹었고 기분 탓인진 몰라도 덜 아프다. 글을 쓸 기운도 없다.


3일 차


아침에 일어날 때 근육통으로 고생이다. 타미플루 먹을 땐 약빨이 돌아서 괜찮아지는 것 같았는데 약기운이 떨어지니 똑같이 아픔. 아침 어지럼증과 두통 근육통으로 잠 깨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하루 중에 입맛이 가장 안도는 타임. 약을 먹어야 해서 겨우겨우 죽이랑 어묵국 끓여 먹음. 양치하다 입 옆이 아파서 만져보니 수포가 잔뜩 올라옴. 면역력이 진짜 떨어지긴 한가보다. 혓바늘은 덤으로 났다. 토하듯 기침하다가 100년 묵은 가래가 나옴. 아이보리색의 정체불명의 가래를 뱉어내니까 좀 살 것 같음. 가래가 목을 막아서 목소리도 잘 안 나왔었는데. 하루종일 먹고 누워있고 자고 그랬다.


4일 차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던 밤 사랑니 자리의 잇몸이 너무 부어서 잠들기 힘들었다. 입을 다물면 잇몸의 부은 부분끼리 먼저 맞닿는다. 그리고 머리 쪽으로 올라온 근육통은 아직도 욱신거려서 아팠음. 어제 하루종일 바깥공기를 1도 쐬지 못해서 스타벅스에서 프리퀀시 다이어리 받을 겸, 물살 겸 해서 외출을 했는데 온도는 좋았으나 바람이 겁나게 불어서 후회 오만 번 함. 그래도 거의 끝물인 게 실감 나는 하루였다. 입술 수포는 딱지가 지고 아물고 있다. 


5일 차


이제 정말 완벽하게 원래의 삶으로 돌아왔다. 출근할 수 있을 기운이었지만, 약을 다 먹는 동안은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오늘까지 연차로 쉬었다. 아침을 조금 먹고 타미플루 먹고 바로 낮잠을 잤고 부었던 잇몸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수포는 이제 딱지가 떨어지면 아물 예정이다. 혓바늘도 90% 이상 들어갔다. 건강을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5일이었다. 사는 동안 진심으로 다신 만나지 말자 독감아.


나와 살면서 아프면 그것보다 서러운 게 없다는 말들 많이 한다. 첫날 자다가 내 끙끙 소리에 자다 깨던 그 순간, 둘쨌날 무거운 몸으로 세 번째 독감 검사를 하러 가던 순간, 셋째 날 세상 안 좋은 컨디션으로 눈을 떠서 약먹기 위해 아침을 준비하던 그 순간들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다. 약기운이 돌고 조금 살만 해지면 사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22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나는, 아프던 순간들 마다 많이 울고 가슴 깊숙이 서러웠고 이렇게 죽을까 봐 무서웠었다. 28살의 나는 생각보다 많이 강해졌다. 더 이상 혼자 아픈 걸로 울지 않고 혼자서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기를 쓰고 병과 이겨내더라. 언니와 엄마가 오지도 못하면서 걱정만 할까 봐 아프다는 걸 끝까지 함구했다. 이젠 이런 속 깊은 모습도 보일줄 아는 나다. 아프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강하고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지만 머리는 가벼운 밤이다.


2018년에 저런 기록을 남겨 두었다. 살면서 저렇게 아파본 적이 없었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인상이 깊긴 했나 보다. 자다 말고 내 끙끙 앓는 소리에 놀라서 깨던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맛이 없는 판타지적인 느낌을 겪어봤다. 이게 입맛이 없는 거구나! 입이 까끌까끌 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2018년는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살벌한 강추위가 덮친 해였다. 칼바람을 뚫고 세 번째 독감 검사를 하러 가던 날은 30분 거리의 회사 근처 병원까지 다시 가야 해서 젖 먹던 힘을 다해서 움직여야 했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던 그날 느꼈던 감정은 정말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했다. 가족들이 걱정을 할까 싶어서 말하지도 못했던 그 감정이 생생하게 생각난다. 독감이 하도 유행이라기에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독감아. 이런저런 감정들이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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