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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ad Mar 03. 2020

생활의 지혜

빨래 개기



대학 기숙사 시절을 제외하면 자취의 경험은 딱 두 번 있다. 독일에서 한 해 교환학생 했을 때와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다. 혼자 사는 것의 장점 중 하나라면 평소 부모님과 살 때 하지 못했던 것들,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들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막차 시간이 지나서 집에 들어온다던가 아침부터 맥주를 따서 영화를 본다던가 그런 소소한 기쁨이 찾아온다. 완전한 독립체가 되는 것 같지만 실은 부모의 그림자를 쉽게 지우기 어렵다. 그토록 지겨워했던 엄마의 습관을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내게는 빨래 개기가 그랬다.

우리 집 삼 남매가 자랄 때 아빠가 출근하면 집안일은 엄마의 몫이었다. 자주도 아니고 가끔인데도, 집안일을 할 때면 엄마의 빈틈없는 성격이 숨 막혀 대충 흉내만 내다가 끝내 짜증을 내고 가끔은 다투고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에겐 일종의 매뉴얼이 있다. 설거지할 때는 식기를 씻는 게 전부가 아니다. 끝낸 후 여기저기 튀어있는 물방울을 행주로 말끔히 닦아야 하고 젖은 행주는 겹쳐서 수도꼭지 위에 두어서도 안 된다. 잘 마르게 반듯이 펴서 개수대에 널어 두어야 설거지의 완성이다. 식기만 깨끗이 씻고서 뿌듯한 표정으로 검사받을 때면 마무리가 잘 안 되어 있다고 엄마는 다시 물을 틀고 행주를 빨며 이런저런 듣기 싫은 소리를 끝이 어딘가 싶을 정도로 했다. 방 청소할 때도 잡동사니나 책장에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닦아두지 않으면 내가 다 했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도 걸레를 가져와 미처 보지 못한 곳을 두 번씩 더 닦아야 그의 성에 찼다. 대부분 수긍을 하고서 타협을 하는 편이었지만 빨래는 아니었다. 엄마는 빨래를 두 번씩 접는다. 한 번 접는 것도 귀찮은데 두 번씩이나. 

세탁기에 색이 있는 겉옷, 하얀색 겉옷, 속옷, 양말, 수건으로 분류를 하는 게 첫 번째다. 세탁기를 돌린 다음엔 아직 물기를 머금은 옷을 개는 것이 첫 번째 순서다. 어릴 적 엄마가 빨래 좀 널어 달라하고 외출을 하고 간 날엔 나는 이 순서를 생략하곤 했다. 어차피 다 마른 뒤 또 개야 할 거, 뭐 하러 마르기도 전에 개서 일을 두 번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갠 뒤에는 다시 펴서 웃옷은 옷걸이에 걸어 널고 바지는 빨래집게로 집어 겹치는 곳이 없게 널어야 한다. 수건은 건조대 봉 두 개를 써야 공간이 생겨 잘 마르기 때문에 봉 한 개에 널어 두는 걸 보면 엄마는 또, 이러면 잘 안 마른다고 그걸 다시 걷어서 엄마의 방식으로 마무리를 했다. 내가 답하는 건 늘 같았다. 어차피 마를 거. 그냥 좀 널면 안 되나? 집안일을 하면 다툼만 잦아져 나는 자연스레 부모의 집에서 하는 가사 노동과는 거리를 두게 됐다. 

독일에서 자취를 처음 시작할 때, 내 곁에는 아침이면 침대 위에 이불을 개어 두는 깔끔한 성격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빨래를 하는 날이었는데 우리 엄마의 빨래 너는 법을 알려 주었더니 그건 정말, 귀찮아서 못 하는 대단한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구잡이 빨래 널기를 실천했다. 일종의 희열이 찾아왔다. 그러다 삼 년쯤 시간이 지나 혼자 고시원에 있을 때였다. 엄마와 다투고 나온 고시원에서 처음 빨래하는 날, 축축이 젖은 빨래를 건조대에 널어두기 전 하나하나 털어 접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던 엄마의 습관이었는데.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얹혀사는 지금, 모두 엄마의 몫이었던 가사노동을 분담하러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인다. 엄마의 방식으로 설거지를 하고 방을 치우고 빨래를 갠다. 하지만 엄마에겐 여전히 부족해 보이나 보다. 엄마의 지혜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또 얼마의 세월이 지나야 할까. 더는 짜증 없이 그의 쌓아온 지혜를 받아들여야겠다고, 세탁소에서 받아온 옷걸이에 티셔츠를 건 내게 두꺼운 걸 가져오라고 말하는 엄마를 보며 다짐한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에게 만족을 주는 매뉴얼이 있다면 그걸 따라 살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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