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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Jan 16. 2021

부캐로 노가다 vs 본캐 갈아엎기

(1) 나는 과감하게 리셋 버튼을 눌렀다.

 의료인의 오버타임은 반복되는 일상이다. 어떤 인턴이, 어떤 간호사가, 어떤 레지던트가 제시간에 퇴근하던가? 한때 주 52시간 근무제가 떠들썩했지만 의료진들은 그것이 말뿐인 허상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단 하루만 근무해봐도 알 수 있다.


한 번은 동료 간호사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본 적 있다. 그랬더니 그녀는, 그래도 이렇게 벌어서 쉬는 날 행복할 수 있잖아. 당시에는 공감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냥 별 이유 없이 한번 계산을 해봤다. 일주일은 168시간이니까. 그중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칼퇴할 경우) 50~60시간 정도, 시작하기 한 시간 반 정도 전부터 준비해서 출근해야 했으니 그 시간을 포함하면 대략 60~70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 병원 밖의 자유시간이 일주일에 대략 100시간 정도가 남는데, 나는 하루 7~8시간씩 자니까 56시간의 수면시간을 제외한다. 그럼 나에게 남는 시간은 채 50시간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것은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후의 계산이다. 신규 간호사라면 최소 주당 -10시간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깨어있는 내 삶의 반절 이상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던 것이다. 병원 밖의 내가 진짜 나고, 병원 안의 나는 그저 일만 하는 '부캐'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간호사로 사는 삶이 내 인생의 본캐였다. 이 결론은 나를 크게 뒤흔들었다.


우리는 일터에서 주어진 시간의 반 이상을 소모한다.


부캐를 위해 희생하는 본캐는 오늘도 우울하다.

 RPG 게임을 하며 본캐의 아이템 수급을 위해 부캐로 주구장창 노가다를 해본 적이 있다. 내 삶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울하고 힘들어하는 간호사 본캐를 위해 부캐인 병원 밖의 내가 이런저런 취미생활을 찾고 힐링을 목적으로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근데 효과는 별로 없었다. 초콜릿을 먹고 빠르게 올라간 혈당 수치는 금방 내려앉는 것처럼, 짧은 휴식은 본캐의 힘듦을 충분히 다독이지 못했다. 휴식의 단맛은 금방 잊히고 나는 다시 일상에 매몰된다. 내 본캐는 행복한 날보다 힘든 날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매번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빌고, 부캐의 시간이 다가오면 행복해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부캐를 위해 본캐를 희생시켰던 것이다. 주객전도의 나날이었다.


 의료진을 포함한 많은 직장인들이 삭막한 직장생활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근데 국내 사회에서 쉽지 않다. 쉬는 날은 적고, 일의 양은 넘쳐나며, 그렇게 우리의 에너지는 제대로 충전되지 못하고 닳아가기만 한다. 당시에 병원에서 휴가는 보통 2년에 한 번 쓸 수 있었고 그마저도 잔뜩 눈치를 보며 써야 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근무를 시작한 이래로 3년 동안 돌아온 6번의 명절에 단 한 번도 본가에 내려갈 수 없었다. 결혼한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부서장의 개인적인 방침 덕분이었다. 불행히도 나는 어렸고 미혼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3년 내내 연말과 새해 첫 날도 병원에서 일을 하며 보냈다. 육체와 정신 모두 닳아갔다.


 하루 이틀 쉬는 날 잠깐이나마 취미 생활을 하고, 휴식을 취해도 일을 시작하면 내 상태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피곤하고 지친 상태는 매일 같이 반복된다. 그렇게 인간은 충전 불가능한 배터리가 되어간다. 모든 에너지를 남김없이 끌어 써버려서, 갈아 끼는 것 외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그런 배터리.


충전 vs 리셋

 나는 내 전반적인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전될 것인가, 충전할 것인가. 이론적인 해답은 두 가지가 있었다.


1. 본캐를 행복하게 만들기
2. 본캐를 갈아엎기


 먼저 1의 방법을 시도했다. 나는 병원에서 행복하게 일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무수히 노력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차게 실패했다. 나의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대부분 나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 시스템을 비롯한 무수한 환경들을 조직의 말단에 있는 개인이 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충전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그렇게 버티는 삶의 끝자락에서, 나는 결국 2의 방법을 선택했다. 나는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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