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흔적] 비 오던 날
장마의 계절이다.
자기 전 빗소리를 듣는 게 좋아 창문을 열어두었는데, 비 오는 날 당신과의 이야기가 떠올라 밖으로 새어나간다. 흘러나가는 이야기를 모른 척 두어볼까.
#1. 묻고 답했던 밤
“저에 대한 마음이 궁금해요.”
고민 끝에 물었다. 섣부르게 마음을 다 꺼내어 내보인 나는 더 잃을 게 없었다.
“데이님이 용기 내어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저도 용기 있고 진심을 담아 얘기할게요. 약속해요.”
원래 말이란 게 이렇게 알아듣기 힘든 것이었나? 아니면 내가 그냥 바보가 되어버린 걸까? 용기 낸 내 마음처럼 당신도 용기를 내어 말하겠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1번부터 10번까지 보기를 주고 객관식으로 답해달라고 할걸. 아니면 양자택일이 가능한 똑 부러지는 질문을 던질걸. 후회해보았지만 "그게 무슨 뜻이죠?"하고 되물을 수는 없었다.
기대감에 설레다가도 곧장 불행해지는 수백만 가지의 대답을 떠올리느라 밤잠을 설쳤다.
다음날 비가 내렸다. 당신은 전날보다 조금 더 멀어진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의 옆모습 정도는 보였던 것 같은데, 이젠 뒷모습이 더 많이 보였다. 표정과 생각을 읽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따뜻함보다 형식적인 차가움이 느껴지는 대화가 오가고, 대답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이 무색해지면서 전날 떠올린 불행한 해석 중 하나가 맞아떨어진다.
비참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비 오는 밤이니 들어오는 찬바람을 쐬며 음악을 들어야겠다’며 슬그머니 몸을 사렸다. 그러나 어설프게 준비한 변명은 영 도움이 되질 않는다. 비는 올라갈 리 없는 하강 운동을 계속하고, 음악은 트는 족족 장조 아닌 단조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아래로만 푹푹 꺼졌다.
내가 묻고, 당신은 대답했지만 나는 그 답에 다시 혼자 묻고 또 답하며 며칠을 꼬박 보냈다.
내가 불안한 감정을 비를 핑계 삼아 감추었던 것처럼, 당신도 용기라는 말로 내 시선을 도망치는 당신으로부터 돌리려 했었나 보다. 당신에겐 그 대답이 최선이었던거겠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깨닫고 나니 당신은 내게서 한참을 멀어져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2. 우산을 빌린 날
밤새 비가 내린다. 짧고 긴 우산들이 나란히 꽂힌 우산꽂이에 당신이 걸려있다.
당신이 나를 먼저 찾은 그날 빌려준 우산이다.
우산은 그날 이후 다시 쓰지 않았다.
어디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우산이었다. 사용하지 않은지 한참이나 지난 듯 오염이 되어있던 우산을 정성스레 닦고 바짝 말려 예쁘게 접었다. 곧 돌려줄 수 있겠지, 하며 내 마음도 잘 보관해두었다가 같이 전해줘야지 싶었다.
우산 주인은 까맣게 잊어버린 그것을 소중하게 붙들고는 집을 나설때마다 당신을 생각했다.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바보같은 희망을 가졌다.
돌아가는 길, 내 손에 우산을 들려 보내며 마음을 다시 거두어갔나. 몇 번이고 돌아본 뒷모습이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그깟 비야 맞고 말걸 그랬다. 뒤돌아가 내가 필요한건 이런게 아니라고 말할걸 그랬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마음을 표현할 때는 다음을 기약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마음먹은 그때 했어야 했다.
내 맘대로 기대하고 실망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주춤하는 사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이에 당신은 가까워질때보다 더 빠르게 멀어졌다.
그러니까 잘못한건 멀어진 당신이 아니다. 불러 세워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은 온전히 타이밍을 잘못 잡은 내 탓이다. 왜 그때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오늘도 여전히 문 밖에 당신이 걸려있다. 비는 내리는데 애꿎은 다른 우산을 집으며 시간만 흘려보낸다.
당신에게 나는 돌려받을 필요 없는 우산이다. 당신이 먼저 찾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