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날 때 종종 옆자리에 앉는 사람과 수다를 떨 때가 있다. 보통 우리는 상대방이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여행을 가던 중이었는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등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아무래도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면 그 이후로 만나기가 힘들다 보니 목적지를 이야기하는 게 가장 무난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된 낯선 사람 두 명이 있다. 짧은 자기소개 후, 두 사람이 이야기하게 된 주제는 여행도, 고향 이야기도, 사업도 아닌 바로 살인이었다.
릴리는 공항에서 테드라는 남자를 우연히 만난다. 대화를 몇 마디 나누어보니 그 남자는 아내의 불륜을 눈치채고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릴리는 그의 아내처럼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사람은 죽어도 마땅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녀는 장거리 비행 동안 혼란스러워하는 테드를 차분한 어조로 설득한다.
릴리라는 사람은 어떻게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걸까?
그 이유는 그녀가 살아온 환경에 있었다. 딸에게는 집중하지 않고 껍데기만 부부처럼 살아온 부모님. 어머니가 불러온 사람에게 성추행당했던 과거. 그리고 부모님이 자신을 도와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저지른 첫 번째 살인. 그렇게 릴리에게 살인은 자신을 보호하는 하나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그럼 왜 그녀는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살인을 권한 걸까? 너무 위험하지 않나?
알고 보니 테드의 아내는, 릴리가 대학생 때 만났던 남자친구를 뺏어간 여학생이었다. 그러니 릴리의 기준에서 보면, 테드의 아내는 '충분히 죽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두 사람은 우연히 공항에서 마주쳤고, 테드가 릴리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복수심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흥미로운 설정에다가 술술 읽을 수 있는 빠른 전개는 '죽여마땅한 사람들'의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다소 아쉬운 점은 독자가 긴박감, 긴장감을 느끼도록 일부러 넣은 전개가 너무 빤히 보였다는 데에 있다. 릴리가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부분이 있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다른 일을 하며 목표물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릴리가 벌떡 일어났다. 벌써 왔나 하면서 현관문을 열었더니 - 오늘은 오지 않는다던 룸메이트가 왔다는 장면. 그 룸메이트는 극에 긴장감만 부여하고는 사라진다. 이런 설정은 너무 티가 나서 오히려 긴장했던 내 기분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결말 또한 '영화'로 만들어지기 적합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란 여주인공의 얼굴, 급하게 클로즈업. 그리고 영화 끝. 묘하게 딱 떨어진다.
p.48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주인공 릴리의 가치관은 보통 사람과 확연히 다르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을 법에 맡기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 처단해버린다. 그리고 그 방식은 - 살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극단적인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다 보면, 또 다른 악이 등장한다. 바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살해하기까지도 하는 미란다이다. (이 둘은 모두 다른 사람을 해하는 데, 목적이 확연히 다르다.) 이 악녀를 처단하려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하려고 릴리는 고군분투한다.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응원을 하게 됐는지, 아니면 그래도 릴리의 방식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의 한 요소가 될 것 같다.
전체적인 감상평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는 영화 같은 요소가 가득합니다. 주인공은 무사히 임무를 해낼 수 있을까? 들키지 않을까? 결국 어떻게 되는 거지?를 생각하다 보면 한 권이 끝나갑니다. 이런 전개의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별점 ★★★☆
이 책처럼 술술 읽히는 책을 원한다면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를 추천합니다. 설정에 의문이 드는 점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죽여 마땅한 사람들'처럼 금방 읽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 일명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소설
이미 많이 언급되고 있는 책으로,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추천합니다. 두 책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살인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는 크게 비슷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나를 찾아줘'에 비해 차분한 느낌이 들었고, 어쩌면 릴리보다 미란다가 에이미와 더 비슷한 존재일 것 같습니다.
도입부가 비슷한 책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과 도입부가 거의 같습니다. 비행기 대신 열차 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살인을 이야기하게 되죠. 그러나 이후의 내용은 아주 다릅니다. '죽여 마땅한...'은 살인을 목적으로 삼고 움직이는데, '열차 안의...'는 살인을 통해 사람의 심리를 묘사합니다. 그래서 분위기도 전개도 다릅니다.
한가지 신기한 것은 이 책의 '옮긴이의 말'을 보면, 저자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소설 도입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p.13
그녀는 책을 덮고 표지가 위로 가게 해서 가방 옆에 내려놓았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1월의 두 얼굴'.
영감을 받지 않은 게 확실할까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