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는 저 정도로 혼나고 끝날까?
나는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을 울면서 봤지만, 한 대목에서 이른바 짜게 식는 경험을 했다. 주인공 라일리는 부모님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전학을 온 뒤 여러 가지로 달라진 일상 때문에 우울해한다. 라일리의 우울은 아빠의 권위적인 대화 방식과 충돌해 폭발한다. “닥치고 나를 가만 놔둬요!” 아빠의 뇌 안에서는 이미 ‘가부장 프로토콜’에 따라 언제든 ‘반란’을 일거에 제압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일리가 폭발하자, 아빠의 ‘버럭이’는 크고 빨간 버튼을 누르고, 아빠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That’s it. Go to your room. Now!
이제 그만. 올라가 있어. 당장!
내가 이 대사를 듣고 벙찐 포인트는 두 가지였는데, 우선 첫번째는 단단히 벼른 끝에 떨어진 불호령 치곤 너무 젠틀하다는 거였다. 물론 안다. 디즈니 영화에서 ‘리얼한 훈육’을 묘사할 수는 없다는 걸. 그러나 그것을 감안해도 아이가 부모에게 입 다물라고 소리를 지른 사태에 대한 피드백이 저토록 짧고 깔끔한 한 마디로 갈음될 수 있다는 건 삼강오륜에 절여진 머리로 얼른 납득하기 힘들었다. 같은 상황에서 동양인 부모였다면? 손이 올라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으-디서 부모에게 닥치라는 말을 해? 입혀주고 먹여줘도 다 소용 없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닌데!
두 번째는 ‘올라가 있어’라는 말이었다.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본래 대사는 ‘네 방에 들어가’ 정도의 뜻이고, 올라가라는 건 번역 과정에서 덧붙여진 것이다(라일리의 방이 2층이기는 하다). 번역가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 바꾼 건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이 의역 덕분에 내게는 해당 장면의 인상이 더 크게 남았다. 그러니까, 자식의 방이 다른 층에 있는 것이다. 엉망이 된 감정을 추스릴 수 있는—그리고 물리적으로 충분히 떨어져 있는—피난처, 그리고 그 공간의 기능을 존중하는 양육자의 존재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국의 가정에서는 흔치 않은 것이었다. 심지어 이 집은 예전 집에 비해 허름해서 라일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미국에서 만든 콘텐츠를 보며 이렇게 몰입이 깨지는 순간들이 더러 있다. 그들이 묘사하는 ‘평균적인 삶’의 모습이 대체로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괜찮기 때문이다. 물론 ‘선진국과 후진국’ 같은 납작한 구도로 볼 수만은 없는 문제라는 걸 안다. 모든 미국인의 집이 복층도 아니고, 넓은 집에 산다고 해서 전반적인 삶의 질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리고 미국 부모 중에도 당연히 폭력적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즈니 역시 관객의 공감을 유도하기 위해 어떤 최소한의 핍진성은 신경 쓰면서 라일리의 가족을 그리지 않았을까. 내게는 그 ‘최소한’조차 아득히 높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