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시드마이어의 문명]으로 보는 인간관계론
게임 [시드마이어의 문명]에서 싱글 플레이를 하면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다른 문명과 조우하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 진시황, 선덕여왕 같은 역사적 인물이 각 문명을 이끄는데, 이들은 플레이어에 대한 호감도와 적대감 수치를 가지고 있다. 지도자별로 사전에 설정된 ‘안건’이 있어서 플레이어가 그 안건을 만족시키면 좋아하고,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싫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도의 간디는 비폭력주의자라는 고증에 따라 평화를 지키는 문명을 좋아하고, 전쟁광을 증오한다. 반대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본인이 아닌 문명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문명을 좋아하고, 평화주의자를 무시한다. 내가 모두를 패고 다닐 정도로 강대국이면 나를 싫어하든 말든 상관 없지만, 외교를 해야 하는 상황이면 인공지능들의 취향에 적당히 맞춰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상대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합니다.
보통 상대가 나를 비난하면 그 이유가 함께 명시된다. 그래서 그 상대의 마음에 들려면 뭘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싫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신경을 끄고 살거나, 유행어처럼 그 이유를 손수 만들어주거나.
그런데 게임을 조금 더 진행해보면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던 상대에게 사실은 모종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게임 내에서 ‘숨겨진 안건Hidden agenda’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인데, 플레이어가 해당 문명에 대한 정보 접근 레벨이 낮을 때에는 이 안건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이걸 알아내려면 수교를 맺거나 첩보를 해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나의 어떤 행동이 미움을 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점을 개선해서 마음을 돌리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다. 인공지능의 마음을 얻는 것도 영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게임을 하다 보니 현실 속 인간관계도 묘하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 열 명 중 일곱 명은 내게 관심이 없고, 두 명은 나를 좋아하고, 한 명은 나를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열 명 중 고작 한 명일 뿐인데, 그 한 명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돌게 만든다. “나는 좋은 사람인데 나를 싫어하다니, 너는 정말 나빠!”
그런데 [문명]의 ‘숨겨진 안건’처럼, 나를 싫어하는 그 한 명에게도 대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언젠가 (나는 기억나지 않는) 말실수를 했거나, 같이 있으면 재미가 없거나, 패션 센스가 구리거나, 그냥 외모가 마음에 안 들거나. 세상에 완전한 ‘그냥’ 같은 건 없는 것이다. 다만 게임과 차이가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상대에게 물어도 솔직하게 답해줄 확률은 매우 낮고, 그 이전에 우리가 그 상대에게 말을 걸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