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문학, 감성이 이야기되는 방식에 대하여
전공을 국문학과라고 밝혔을 때 들었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그럼 소설 같은 거 쓰셨겠네요"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에서 들었던 "국문학과는 다 싸이코 아니야?"이다. 어떤 분야에 대한 앎은 대체로 비슷한 지점에 수렴하지만, 몰이해는 저마다의 모습으로 대환장파티다.
노파심에 해설을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국어국문학과 전공 수업 중에 소설쓰기가 있긴 하지만 안 들어도 졸업할 수 있다. 문학을 쓰는 것을 주로 하는 전공은 문예창작학과다. 그리고 싸이코는 사이코패스의 줄임말로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는 능력이 낮은 성격장애다. 상대방의 전공을 묻고 근거 없이 비방해 상처를 준 뒤에도 별 느낌이 없었다면 의심해볼 수 있다.
두 반응은 국문학, 혹은 국문학이 대표하는 '인문학' 전반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 첫째는 인문학이 어떤 식으로든 글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글'은 보통 문학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평론, 칼럼, 기사, 르포 등 다양한 산문 장르가 있지만 그중의 왕은 역시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인 것이다. 위의 일화에서는 내가 국문학과라고 밝혔던 것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 생각해도 문학이 곧 '글'이라는 인식은 지배적이다.
둘째는 인문학은 이성보다는 아무래도 감성 쪽에 가까운 무언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감성은 역사적으로 이성보다 열위에 있거나 이성의 여집합인 무언가로 정의되어 왔다. 특히 군대처럼 효율을 중시하는, 동시에 반지성주의와 집단주의가 만연한 조직에서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은 어딘지 괴짜스럽고 '정상은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전술했듯 문학이 '글'을 과잉 대표하는 상황에서 예술과 광기를 연결하는 관습적 사고가 더해지고, 거기에 일부러 과장하고 위악적으로 말하는 남성 집단의 말하기 필터를 거치면 국문학과는 다 싸이코라는 말이 탄생한다.
나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문과와 이과를 나눠 놓는 교육과정과 그 둘의 차이를 유희로 소비하는 문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터넷에는 잊을 만하면 이 두 집단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하는 '유머' 자료가 올라온다. 이 하위문화 속에서 '문과의 감수성'이 무슨 사안이든 감성에 호소하며 어중간하게 덮고 넘어가려는 나이브함이나 무책임함으로 재현된다면, 소위 '공대남친'이라는 이미지로 자주 성별화 되는 '이과의 냉철함'은 합리적(?) 사고력의 대가로 기초적인 공감능력도 없고 사회화도 되다 만 퇴행적 인간상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재현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인문학/자연과학, 감성/이성, 인간적/비인간적, 언어/비언어 등의 대립쌍으로 나누어진 세계관을 만든다. 이 깔끔한 이분법을 교란하는 노이즈들, 이를테면 '문과'인 경제학에 수학이 사용된다거나, 이공계에서도 논문 작성을 위해 글쓰기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쉽게 무시된다. 그렇게 단순화시켜서 대립되는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이 현실의 복잡함을 논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재미있으니까. 공화당/민주당, 구글/애플, 고려대/연세대, 얼라이언스/호드처럼(가나다순이다).
ax+by+cz=-d에서 -d가 (x1, y1, z1)과 법선벡터의 내적의 값일 때 문과 애들 패고 싶다.
g=9.8m/s^2이 성립하지 않을 때까지 문과 애들 패고 싶다.
H2O가 H- 1/2O+로 분해될 때 문과 애들 패고 싶다.
마이크로글리아가 인터루킨-10을 발현시킬 때마다 문과 애들 패고 싶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과 애들 패고 싶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이과 애들 패고 싶다.
저문 강에 씻은 삽으로 이과 애들 패고 싶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랑 이과 애들 패고 싶다.
이 흐름 속에서 십 년 전쯤에 '패고 싶다' 시리즈가 유행했다. 여기에 한 줄을 얹는 방법은 단순하다. 고등학교 수준의 '문과 지식'이나 '이과 지식'을 맥락 없이 꺼낸 뒤 상대 진영 애들을 패고 싶다고 덧붙이면 된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대결은 어딘가 이상하다. 이과생은 문과생이 제대로 읽지도 못할 수학과 과학 지식을 과시하며 파상 공세를 펼쳤는데, 문과생은 대뜸 시구를 인용한다. 혹시 이과생은 시를 외울 줄 모른다고 믿고 싶은 걸까? 수학과 과학 지식에 상응하는 것이 문학을 읽고 감동하는 능력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밸런스가 안 맞지 않을까?
'문이과 드립'을 보며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인문학', '문학', '감성'이라는 세 개념이 뚜렷한 경계 없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마치 '척추동물', '코끼리', '단백질'처럼 의미도 위계도 완전히 다른 이 셋은 적당히 비슷한 것으로 퉁쳐져 있다가 '인문학적 상상력' 같은 구호에 의해 호명되면 세트로 불려 나온다. '스토리텔링'도 이때 단골로 붙는 사이드킥이다.
뭐, 다 좋다. 인문학도 문학도 감성도 전부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인문학적 상상력을 강조하는 주장들은 항상 성공한 사례에 사후적으로 붙는 주석으로만 제시돼 왔다는 것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왜 성공했는지 알아보면 그건 북유럽 신화를 [토르]로 각색할 수 있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비결이더라,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유수의 IT 공룡들도 매년 인문학도를 몇 천 명씩 뽑는다더라. 인문학은 그 자체로 추구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항상 '잘 나가는 것들의 비결'로서, 혹은 그렇게 잘 나가고 있지 못한 지금 우리에게 결여된 대안으로서만 요청되고 소비된다.
그렇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인문학을 모셔 오려고 마음먹으면, 그때가 돼서야 앞서 말했던 인문학에 대한 개념적 교통정리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 펼쳐진다. 인문학… 그… 뭔가 문학 같은 거 아닌가? 막 감성적인 글 읽고 상상하고 그런 거. 아, 그럼 직원들에게 매월 소설책을 한 권씩 의무적으로 읽게 하면 되겠구만! 독후감 써 오게 해서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2010년대 중반부터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유행하기 시작한 '창의융합형 인재'라는 말에서도 유사한 공허함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반대로 인문학도들에게 코딩을 가르쳐 '엔지니어링적 사고'를 주입시켜야 한단다. 내게는 왜 '인문학적 상상력'과 '엔지니어링적 사고'가 영혼의 쌍둥이처럼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