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
성공한 인물이 사회에 공헌하는 이야기는 당연하고 진부해 보인다. 결식아동을 돕기 위해 거액을 쾌척했다는 연예인과 기업인의 소식에 우리는 그렇게 감동받지 않는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남을 돕는 사람들의 미담과 비교하면, 많은 재산에서 일부를 내놓는 것은 너무도 쉽고 진정성 없는 일인 것이다. 상류층의 선행은 경우에 따라서는 위선이거나, 시혜적 태도이거나, 다른 속내가 있는 것으로 쉽게 간주된다.
이런 시선은 때로는 음모론으로 비화하기도 한다. 2015년 TED 강연에서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천만 명 이상 죽게 된다면, 그것은 전쟁 때문이 아니라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던 빌 게이츠는 그로부터 5년 뒤 코로나바이러스를 둘러싼 황당한 음모론의 중심이 됐다. 바이러스를 퍼뜨려 인류를 절반 이하로 줄이려 한다거나, 백신을 접종해 우리 몸 안에 마이크로 칩을 심는다는 등 영화 시나리오로 써도 핍진성이 떨어진다고 비판받을 만한 이야기들이 퍼졌다.
물론 우리는 백만장자의 머릿속을 알 수 없다. 가짜 뉴스의 주장처럼 빌 게이츠가 인류의 반을 날려버리지야 않겠지만—부자들의 재단 설립은 흔히 세금 회피를 위한 것으로 의심받는 것이 사실이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구호의 이면에는 항상 이기적인 동기가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기심에 의해 결과적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그건 어쨌든 좋은 일 아닐까. 설사로 죽는 어린아이가 줄어들고, 소아마비가 근절되고, 다가오는 기후 변화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원제는 [Inside Bill's Brain: Decoding Bill Gates]이다. 제목에 쓰인 디코딩(Decoding)은 암호화된 정보를 해석해내는 작업을 뜻한다. 과연 빌 게이츠는 풀어내야 할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천재 프로그래머, 백만장자, 혁신가, 독점 기업가, 자선 사업가. 그가 개발한 프로그램만큼이나 다양한 정체성들이 한 사람의 몸에 들어가 있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인사이드 빌 게이츠]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한 축에서는 그가 참여한 세 개의 공익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그는 제3세계의 위생 문제를 해결하고 소아마비를 종식시키려고 하며,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차세대 원자로 개발 사업에 참여 중이다. 다른 한 축에서는 아들, 친구, 남편으로서의 빌 게이츠를 조명한다. 어머니와 형제들, 친구이자 전 동료 폴 앨런, 아내이자 빌 & 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공동창립자인 멀린다 게이츠까지,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빌 게이츠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병렬 구성을 통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이를테면 IT 사업가가 어떻게 제3세계의 위생과 식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온갖 종류의 책을 두루 섭렵하는 노련한 독서가의 모습이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번 '생각 주간'이라고 이름 붙인 휴가 기간 동안 별장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측근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한 시간에 150페이지를 읽고 내용의 90%를 기억한다.
그런 그가 읽었던 책 중에 [세계 개발 보고서]가 있었다. 관련 전공자가 아니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 같은 이 책에는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가 설사로 죽는지 보여주는 통계가 수록돼 있었다. 안전한 식수만 보급됐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질병 때문에 한 해에 3백만 명의 아이들이 다섯 살이 되지 못하고 사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년에 3백만 번, 부모들이 설사로 죽은 아이들을 묻는 동안 제가 시간을 보내는 세상에서 설사로 죽은 아이를 묻은 부모는 단 한 명도 못 봤어요. 그 때문에 의문이 생겼죠. 세상이 엄청난 자원을 이런 죽음을 피하기 위해 쓰고 있기는 한 걸까?" —빌 게이츠
그 '엄청난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빌 게이츠가 [세계 개발 보고서]를 읽고 제3세계의 식수 문제를 고민하게 된 배경에는 아내와 어머니의 지분이 있었다. 일의 시작은 아내인 멀린다 게이츠가 1997년 뉴욕 타임스의 한 기사를 읽고 남편과 나눈 대화였다.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쓴 [제3세계에서 물은 여전히 치명적이다]라는 기사는 세계의 아이들이 뉴욕이 아닌 니제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예방 가능한 원인에 의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알렸다. 이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당시 어린 딸이 있었던 게이츠 부부의 마음을 움직였다. 빌 & 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서막을 알리는 이 이야기에서 멀린다는 빌과 동등하게 존중받는 파트너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이전에, 빌 게이츠의 모친 메리 맥스웰 게이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어린 빌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계와 독서에 빠져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괴짜를 사회적 동물로 만드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이었다. 본인이 지역 공동체의 유지이기도 했던 메리는 자식들에게 공동체에 기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빌 게이츠의 누이들은 어머니가 1994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빌의 이정표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한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빌 게이츠는 이처럼 처음부터 완성된 천재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다듬어질 수 있었던 원석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평생을 다 써도 못 쓸 재산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기부하겠다고 답한다. 이 대답들만 놓고 보면 충분한 부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타심을 발휘하고 남을 돕는 본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끔 폭로되는 상류층의 일탈은 인간의 욕망이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똑같이 추한 모양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빌 게이츠는 우리에게 어떤 귀감을 보여준다. 그것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가장 잘 해낼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행에 옮긴다. 이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말로 평하는 것은 그에 대한 납작한 미화일지 모른다. 그는 그저 기술과 자본이라는 망치를 든 사람일 뿐이다.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문제는 언젠가 망치질이 되어야 할 프로젝트이다.
빌 : 누군가를 고무하는 게 제 목표는 아니에요. 세상에는 자원이 한정돼 있어요.
감독 : 고무하려고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면 뭘 위해 하는 거죠?
빌 : 최적화요.
2017년 2월 17일, 빌 게이츠는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차트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차트 하나를 첨부한 트윗을 올렸다. 차트는 꾸준히 감소해 온 5세 미만 아동의 사망 건수가 2015년에 이르러 1990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황을 보여주었다.
영아사망률과 함께 소아마비 또한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며, 아프리카에서의 발병 보고는 2016년 나이지리아를 마지막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에는 나이지리아에서도 3년 연속으로 소아마비 사례가 발견되지 않았다. 국제보건기구는 2020년 8월 아프리카에서 소아마비가 공식적으로 박멸되었음을 알렸다.
인간은 보고 들은 것 위주로 상상하기 마련이며, 상상력은 전염성이 있다. 그래서 멋지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 사람의 사회적 계급을 막론하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물론 억만장자가 아니지만, 망치를 하나씩은 들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