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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젠 Nov 12. 2020

북툰: 과학을 넋 놓고 듣게 만드는 기술


그냥 책도 안 읽는데
하물며 과학책은


과학책 읽기는 그리 대중적인 취미는 아니다. 애초에 독서 자체가 대중적인 취미도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자연과학 도서는 문학이나 에세이, 인문과학에 비해 더욱 손이 가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계열은 그냥 이야기를 듣는 느낌으로 읽어나갈 수 있는 데 반해, 과학 얘기는 왠지 기본적인 선수지식이 없으면 페이지가 안 넘어갈 것 같아 막연히 경원시하게 된다.


하지만 좋은 스토리텔링과 만난 과학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 사례는 많다. 2014년판 [코스모스]는 (1980년 버전도 그랬지만) 최상급의 연출력과 만난 과학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로맨틱해질 수 있는지 보여줬고, 앤디 위어의 소설 원작 영화 [마션]은 엄청난 양의 화학, 생물학, 천문학, 엔지니어링 지식을 '화성에 홀로 남겨진 남자의 생존기'라는 당의정으로 코팅해서 대중의 목구멍으로 밀어넣는 데 성공한 차력쇼였다. 그리고 한국에는 이런 유튜브 채널이 있다.




책 얘기를

하지 않는 북튜버


2018년 10월 업로드를 시작한 [북툰]의 정체성을 짧게 요약하면 '과학책 북튜버'이다. 모든 영상은 각각 한 권씩의 과학 도서를 레퍼런스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도서를 소개하는 데 할애되는 것은 영상 말미의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다. 그 나머지 분량에선 책이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대신 [북툰]은 해당 도서가 담고 있는 지식을 다른 방식으로 재배열하고 2차 가공하여 더 흥미로운 포맷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를테면 이 영상은 데이바 소벨의 저서 [행성 이야기]가 레퍼런스이다. 해당 도서는 매 챕터마다 태양부터 명왕성(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05년으로, 명왕성이 행성 지위를 잃기 1년 전이다)까지 모든 천체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관련 지식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행성 이야기]와 같은 형식으로 태양부터 명왕성까지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해당 도서에 대한 충실한 리뷰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상 콘텐츠로서는 호흡도 길고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들 것이다.


[북툰]이 이 영상에서 시도한 '2차 가공'은 '태양빛의 여행'이라는 컨셉이다. 이 영상은 도서에서처럼 모든 천체를 훑는 대신 수성과 금성만 살펴보는 것으로 분량을 대폭 줄였다. 그리고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수성과 금성을 거쳐 8분 만에 지구에 도달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시청자와 함께 태양부터 지구까지 실시간으로 8분 가량을 여행한다는 컨셉으로 영상을 만들었다. 도서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하면서도 그 형식만큼은 독창적으로 가져가는 스토리텔링의 기술이 [북툰]의 영상을 클릭하게 만든다.




반지성주의와 싸우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


그래서 중간 단계가 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에겐 필독서가, 나머지 분들에겐 재미있는 교양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담담한 톤의 중저음 나레이션에서 느껴지는 [북툰] 크리에이터의 이미지는 조용하고 점잖은 독서가에 가깝지만, 그런 그도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있었다. 그 상대는 과학적으로 이미 증명이 끝난 사실을 강한 신념만으로 집요하게 반박하는 반지성주의자들이다.



2019년 12월 21일 올라온 영상인 [창조론은 왜 과학이 되려고 할까?]는 도널드 R. 프로세로의 저서 [화석은 말한다]를 레퍼런스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창조론을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데 어떤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전략을 동원했는지 소개하는 영상이다. 유튜브의 창조론자들을 자극한 것은 창조론의 주장들이 어째서 낡고 틀린 것인지 구체적으로 반박한 부분이었다. 창조론이 진화론을 반박하는 오래된 주장 중 하나는 생물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간 단계 화석', 이른바 미싱 링크(missing link)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래로 이루어진 고생물학계의 성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자기고백일 뿐이다.


[북툰]은 위의 영상에서 [화석은 말한다]가 소개하는 많은 중간 단계 화석만 봐도 이 주장은 쉽게 반박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중간 단계 화석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유튜브의 창조론자들은 창조론을 비판하려거든 중간 단계 화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라고 공격했고, [북툰]은 영상에서 소개한 [화석은 말한다]를 읽어보라는 답글을 달았다. 그러나 의문을 독서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은 애초에 창조론자가 되지 않는다(이것은 모든 반지성주의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창조론자들은 [북툰]이 명확한 증거 대신 책을 추천한 것이 논쟁을 도피한 것이라고 정신승리를 하기에 이른다.



결국 [북툰]은 약 2주 뒤[중간단계 화석을 시원하게 보여드립니다│진화론의 증거]라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중간단계 화석이 없다구요? 션하게 보여드립니다!"라는 썸네일을 단 이 영상에서 그는 네 발 달린 도마뱀과 뱀의 중간 단계, 도롱뇽과 개구리의 중간 단계 등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직관적인 중간 단계 화석들을 소개한다. 실제 화석의 사진을 함께 보여주며 진화의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 이 영상은 그 자체로도 높은 정보량과 흥미로움이 가득한 콘텐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조론자들을 흔적도 없이 증발시키는 쾌거를 거뒀다. 물론 이 영상에서도 나레이션의 어조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담담하고 차분했다는 점이 킬포인트라 하겠다.




하나만 본다면, 이 영상



[북툰]의 영상 중 하나만을 추천해야 한다면 이 영상을 추천하고 싶다. 칼 세이건 외 5명의 저자가 공동집필한 책 [지구의 속삭임]과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를 레퍼런스로 제작된 [보이저호가 외계인에게 발견된 날]이다. 이 영상은 보이저 호가 외계 지성체와 조우할 경우를 대비해 탑재한 '인류 소개서'인 골든 레코드가 실제로 상당한 지성을 갖춘 외계인들에게 발견된다는 가정으로 시작한다(조금 웃기지만 이 외계인은 스타워즈의 츄바카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 영상에서도 원전 도서의 지식을 흥미롭게 재배치하는 '2차 가공 스토리텔링'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골든 레코드에 어떤 내용들이 수록되었는지 소개하는 [지구의 속삭임]과 반대로, 이 영상은 외계인들이 인류의 의도대로 골든 레코드의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해낸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칠지에 대해 다룬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정, 정교하게 구성된 외계인의 추리 과정, 그리고 약간의 '소름'과 감동이 있는 반전까지 거를 타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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