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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주은 Jan 06. 2019

할머니와 하얀 양말


요즘들어 할머니가 생각난다. 나의 엄마를 엄청 구박하던 할머니. 나보다도 고모네 언니, 큰아버지네 오빠, 작은아버지네 오빠를 더 귀히 여기셔서 나를 언제나 속상하게 만드셨던 할머니. 치매를 앓으시던 마지막 3년동안 그렇게 이뻐하셨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 다 못 알아보시고 엄마와 나만 알아보셔서 그 병수발까지 끝끝내 도맡게 하셨던 할머니. 참 미웠었다. 끝까지. 
그 마지막에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어서 이 모든 게 끝나길 바랐었다. 나에겐 할머니보다 엄마가 더 중요했었다. 단 한번도 나는 나의 엄마의 편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런 할머니인데 나는, 왜 할머니가 생각이 날까?...
할머니는 참 양말을 잘 빠셨다. 마치 그게 취미인냥.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새엄마가 쪼그리고 앉아 양치질을 하던 모습, 슬픔을 비워내듯, 고통을 들어내듯 하던 그 움직임. 그 새엄마의 모습이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양말을 비벼 빠는 할머니와 자꾸 오브랩된다.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집만 가면 내 양말을 가지고 가서 한참이나 그것을 비비고, 또 비비고.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산 할머니지만 손에 물 묻히시는 분이 아니셨다. 힘든 농사일은 할아버지가 다 하고 할머니는 대청마루에 앉아 이러쿵저러쿵 지시만 하셨단다. 며느리들이 오고나선 며느리들을 종부리듯 부리고 살림까지 손을 놓으셨다. 할머니가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어린 날 내 기억 속에 옛날식 다림질과 양말 빠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자주 후라이펜 같은 다리미에 숯을 얹고 천을 다리셨다. 난 그 천의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저고리, 바지도 다리고 이상한 기저귀천도 다리셨다. 할머니는 그 일을 참 진지한 표정으로 시간을 들여, 마치 고귀한 종교의식을 하듯 하셨다. 
할머니는 꼭 흰 양말을 신으셨다. 아니면 흰 버선. 그것을 빠는 일은 할머니에게 아주 큰 일이셨다. 다른 옷은 그닥 시간을 들이지 않거나 당신이 하지도 않으셨는데 유독 양말엔 정성을 쏟으셨다. 할머니와 같이 살 때는 몰랐는데 우리가족이 분가를 한 이후로 더 잘 알 수 있었다.
불과 3분 거리에 있는 할머니집에 나는 자주 갔다. 나의 엄마아빠가 자주 싸웠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아빠가 싸우면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지 할머니집 대청마루에 누워있었다. 그러면 할머닌 내 양말을 빨았다. 나는 그 모습을 그냥 말없이 보고있었다. 할머니는 오래도록 양말 하나를 가지고 비누칠을 하고 또하고 또해서 그 마지막 뗏국물 하나조차 다 지워내어 하이얀 새양말로 만든 후 탈탈 털어 빨랫줄에 하나씩 빨래집게로 고정하여 길다랗게 매달아놓았다. 생선을 말리듯 덩그라니. 얼마나 꽉 짜고 짰는지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하얀 양말.
할머니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치매로 기억을 잃고 밥솥의 용도조차 잊어버리고 돌을 주워와 아궁이를 만들어고 냄비를 걸고 불을 지펴 밥을 하는 지경에도 할머니는 나의 양말을 빨아댔다.
할머니에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젊은시절, 무당이셨다는 할머니. 결혼하고 가난하지만 할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공주같이 사셨던 할머니. 그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자식만 바라보며 사셨던 할머니.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을 죽는 그날까지 보지못했던 할머니. 
할머니의 얼굴 보다 선명히 떠오르는 할머니의 하얀 양말. 그토록 미웠던 할머니가 덩그러니 내 맘 속에 양말 한 쌍으로 자꾸만 솟아나고 솟아나고...그러다 더 선명해진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우리는 늘 내안의 고통이 가장 커 그 누가 어떻게 고통을 감내하고, 이기고, 피하며 살아내는지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그 인생의 무게를 그렇게 이겨냈고, 나의 엄마는 노동으로 이겨냈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이겨내고 있는가? 싸우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모든 사회에 부조리가 만연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삶이 슬픔이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자기의 지구를 지고 또 그 무게를 가벼이 하는 방법을 조금씩, 하나씩 터득하며 인생의 종착역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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