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날두의 교훈 #1

축구와는 멀리 떨어진 글

by 도리

멘붕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멍하니 지하철 타고 집에 오는 길, 옆에 탄 꼬마가 부모를 부여잡고 성통곡을 했다.




한국에 호날두가 온단다.

그것도 K리그 올스타랑 붙는다고!

K리그 팬인 나는 당연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축구팬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10년 전 바르셀로나와의 악몽이 있기 때문이라나. 다 메시를 보러 온 건데 정작 메시는 몇 분 안 뛰었다고 했다.


축구팬이 된지 얼마 안 된 나는 호날두의 '45분 의무출전조항 계약'을 순진하게 믿었다. K리그에 관심없던 사람들이 호날두 보러 왔다가 조금이라도 관심가지게 되면 좋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남자친구도 신나 했다. 우리는 예매 날만을 기다렸고, 40분동안 예매 사이트가 먹통이 되어 전전긍긍했고 결국 예매에 성공했다. 기대감으로 가득찼다. K리그는 전례 없는 세련된 광고를 만들어 홍보했고 팬투표로 올스타를 정해서 관심을 끌었으며 며칠 전부터 인터뷰도 하고 팬사인회도 가졌다.


경기 당일, 비가 많이 왔다. 걱정이 됐다. 나와 남친은 개인 연차를 써서 회사를 2시간 조퇴했다. 그냥 퇴근하고 가도 괜찮았겠지만 혹여나 늦을까봐. 그리고 오전 내내 비가 많이 와서 깊이 심려했고, 점심 시간엔 밥 빨리먹고 문구점에 들러 우비도 샀다.

4시 퇴근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비가 오니까 우산과 우비를 한 쪽 어깨에 주렁주렁 챙겼다.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채로 남자친구를 만났다. 합정역에서 사람이 꽉 차서 낑기는 것도 감수하며 즐겁게 여행했다.


아니 쓰다보니까 또 억울하네. 티켓 예매에 성공한 내 동생은 미리 종이티켓으로 교환하러 일주일 전에 상암까지 다왔다. 왜? 경기날 늦.을.까.봐!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인가?


경기장 입장 줄도 한참이었다. 한참을 거북이처럼 줄지어서 3층까지 올라갔다. 경기 40분 전,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을 것을 기대하며 입장했다. 그런데 경기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천진난만하게 신나서 셀카를 찍었다. 축구장을 찍고, 축구장을 배경으로 찍고.


경기 10분 전쯤, 전광판에 유벤투스 사정으로 경기가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가 떴다. 이 때부터가 우리 잘못일까? 킥오프 시간에도 도착을 안 하는 상대팀을 순진한 마음으로(혹자의 말에 의하면 자존심도 없이) 기다린 게.

8시가 넘어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 인터넷이 잘 안 됐다. 겨우 겨우 검색해봤더니 태풍으로 비행기가 지연되어 유벤투스가 4시 반에나 공항에 도착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 팬 사인회에 호날두가 안 나왔다고. 그리고 6시 반에 서울로 출발한다고.


헐, 6시 반에 이 서울을 뚫고 오겠다고? 그럼 와서 몸도 안 풀고 경기하는 거 아냐? 그럼 너무 김빠지는데. 그래도 몸은 풀고 정식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잘못이었을까?

8시 20분쯤 드디어 유벤투스 선수들이 들어왔다. 다행히 몸을 푸는 시간이 주어졌다. 킥오프는 8시 50분에 한다고 안내됐다. 최악의 경기지연이었다. 무리 늦어도 도착 자체를 킥오프 시간이 넘어서 하는 경우가 어디있나?


그렇지만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호날두의' 유벤투스가 정식으로 몸을 풀고 팀K리그와 경기를 한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금 생각하면 진짜 어이없는 일이다. 원래 K리그 규정에는 원정팀이 45분 이상 늦으면 경기를 중단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느 문단에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호날두는 몸도 풀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됐고, 호날두는 선발이 아니었다. 교체 명단에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무려 호날두가 우리 한국에서 90분 풀타임을 뛸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생각보다 경기는 비등했다. 유벤투스가 잘 하는 팀이라서도 그렇지만 K리그 올스타 선수들은 처음 호흡을 맞추는 거라 잘 안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전반 몇 분만에 FC서울에서 뛰고 있는 오스마르가 골을 넣은 게 아닌가! 관중들의 기대감이 확 올라왔다.

전반전은 팀K리그가 선전했다. 수비도 악착같이 막고 공격도 악착같이 시도했다. 옆에서 사람들이 '와, 그래도 안 밀리네.' 하는 말이 들렸다. 정말 뿌듯했다. 유벤투스에 맞서서도 안 밀리는 K리그라니. 유벤투스가 열심히 뛰어준 것도 고마웠다. 당일 일정이라 피곤할 텐데 고맙고 매너있게 느껴졌다.


이윽고 세징야가 한 골을 더 넣었다. 평소 호날두를 정말 동경했다는 그는 벤치 앞에 앉은 호날두 앞에서 세리머니를 했다. 분위기는 더 고조되었다. 우리는 벤치에서 축구화를 신고 있는 호날두가 후반에 나올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반이 시작됐다. 그런데도 호날두는 벤치에 앉아 요지부동이었다. 호날두를 카메라에 비춰줄 때마다 우리나라 관중들은 천진난만한 팬심으로 '우와!!!'를 외쳤다.


후반에 타가트가 나와 골까지 넣자 나는 더 신이 났다! 그야말로 대통합 경기였다. 서울과 수원과 전북은 K리그에서 서로 욕하기 바빴는데, 모두가 한팀이 되어 얼싸안고 세리머니를 하다니! 축구 앞에서 국민은 통합된다는, 정말 가치있는 장면이었다.

관중들은 유벤투스가 골을 넣어도 환호했지만, 국적 앞에서는 또 우리나라 편이 되었다. 팀K리그가 프리킥 준비를 할 때 여기저기서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이 터져나왔다.

모두가 호날두를 보러 왔겠지만 그래도 체절명의 순간에는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 그 자체로도 가치와 재미가 분한 경기였다.


그런데 후반 15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표정(=내 표정)은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호날두가 너무 미동도 없었던 것이다. 출전 계약을 전적으로 믿고 있던 순진한 관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부터 모든 경기는 망쳐졌다. 그 한 명 때문에. 시간은 1분 1분 지나가고 관중들은 집중해서 경기를 관람할 수가 없었다. 계속 호날두를 쳐다봤다. 그런데 몸도 전혀 안 풀고, 유벤투스는 계속 다른 선수만 교체해댔다.

정말 설마 설마 했다. 그래도 20분이라도 나올 줄 알았다. 그래, 그게 어디야. 축구에서는 20분에도 많은 일이 일어나니까. 그런데 내 마지노선인 20분을 넘어가자 점점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실시간 뒤통수의 현장이었다. 관중들의 집중력은 점점 떨어졌고 설상가상 3대 1로 우세하던 경기를 동점까지 허용했다.


결국 경기가 끝나기 10분 전, 남자친구가 사람이 몰리기 전에 나가자고 했다. 집에 가려면 두 시간을 또 서울 여행을 해야 하는데, 경기가 1시간이나 늦어져 어느덧 11시가 가까워진 것이다. 나는 끝나기 10분 전까지도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5분 정도 남았을 때 머리에 스팀이 오르는 걸 느끼며 등을 돌렸다. 너무 화가 났다. 사람이 너무 많이 화가 나면 화도 안 나고 그냥 멍해져서 입을 꾹 다물게 되더라, 압력밥솥처럼.


한 아이가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의 부모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지하철엔 여기 저기 로날두가 많기도 했다. 저런 거 유니폼 사면 택도 안 떼고 보관한다며? 그런데 호날두 온대서 다 그걸 꺼내서 입고 온 거다. 한국 남자들도 그 슈퍼스타를 동경하는 어른아이일 뿐이었다. 그 수많은 동심에 생채기가 남겨졌다.


그 와중에 끝까지 경기를 보고 있던 지인에게서 온 전화, 지금 끝났는데 호날두가 인사도 없이 나갔다는 게 아닌가.


정말 우리 모두가 호구가 된 것일까?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많은 관중들이 그렇게 자기만 보고 있는데 단 1분도 뛰지 않았다. 안 온 것도 아니고 왔으면서!


호날두 뛰는 거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던 관중들은 마지막 10분쯤까지 '호날두! 호날두!'를 외쳤다. 그 소리가 '메시!'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진 10분, 사람들은 메시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게 비아냥대는 의도인가? 마지막 5분이라도 나와주기를 바란 간절함이었다.


모든 심을 묵살하고 무표정으로 나가 버린 '남의 형'. 축구를 본지 얼마 안 된 나도 이렇게 허탈한데 10년을 호날두의 팬이었다는 사람들은 얼마나 허탈할지 상상이 안 갔다.




멍한 상태로 교통수단이 데려다 주는 대로 집에 왔다. 주말 내내 내가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아무 의욕 없이 축 쳐져 가만히 있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내가 너무 오버하나?' 하는 생각을 수도없이 했다. 하지만 경기장 도착하자마자 찍은 천진난만한 셀카를 보면 또 다시 기가 막히는 걸 어쩌라고. 아침에 우비를 사고 비가 올까봐 걱정하고 회사에 조퇴를 얘기한 모든 행동들이 한치 앞날도 모르는 생 바보의 행동처럼 느껴졌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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