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사건으로 뼈저린 인생의 교훈을 세 개나 얻었는데, 돈이든 감정이든 꽤 큰 값어치를 지불한 대가였다. 때아닌 '호날두의 교훈'인 셈이다.
1.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경우의 수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가 뭐 큰 걸 바란 건가?
십몇만원 냈고, 45분 의무출전이라는 계약을 믿었고 세계적인 선수를 볼 수 있다는 합당한 기대를 했다. 당연히 그 날 밤 순탄하게 호날두를 보고 즐겁게 돌아올 줄 알았다.만에하나 45분 모두 뛰지 않더라도, 30분이라도, 20분이라도 어쨌든 '뛰는 호날두'를 보는 데에는 단 1그램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뒤통수를 맞은 거지, 엄청 세게.
나는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경험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현실 충격이었다.
이제야 기사가 나오는 걸 보니 현실적으로 상황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45분 의무 출전 계약이라는 걸 왜 당연히 100%인 것으로 믿었을까? 뚜껑을 열어보니 불출전에 대한 위약금은 전체 계약금의 1/4도 안 되는 거였단다. 반대로 말하면 호날두는 1/4의 위약금만 물면 얼마든지 안 나올 수 있었다는 것.
'45분 출전 계약 삽입'이라는 말에전부다 바보가 된 것일까? 왜 계약이라는 것은 예외도 있고 깰 수도 있다는 걸 1도 생각 안 했을까?
계약을 하면서 위약금이 적다고 깨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신뢰라는 게 뭘까 싶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너무 안일한 계약이었던 게 되었다. 이렇게 비신사적으로 계약을 깰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조차 우리 탓이 되었다. 계약서를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계약서는잘 될 경우가 아니라 망할 경우의 가이드라인이었다.
2. 그 누구도 함부로 무시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슈퍼스타 호날두에게는 6만명쯤 패싱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분노하든 말든 그냥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의 분노가 그에게 전해질 방법이란, 없다.
원래 세상은 그런 거였다. 내가 이제까지 은연중에 무시했거나 잘못했던 사람들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복수하거나 타격을 준 적은 없다. 만약 세상이 그렇게 '틀림없는 권선징악'이라면 이 세상은 안 돌아갈지도 모른다. 똑같다. 호날두 인생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한 사람만 억울하지.
나는 이제까지 뉴스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약자의 목소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또 그런다고 생각하거나, 관심 없거나.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사건을 통해 정말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다. 당한 사람의 분노는 그 사람에게는 큰 것이다. 당한 사람에게는 아주 크고, 저지른 사람에게는 아주 작다. 호날두 사태를 맞은 나는 너무 화가 나고 주말 내내 기분을 버렸지만, 호날두는 그저 집에 가서 좋단다.
그게 세상이다. 이 사태의 크기가 누군가에는 굉장히 사소한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큰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분은 우리가 직접 돌려줄 수 없다. 그 입장이 되어 봐야만 알 수 있다.
그가 나이 들어서 언젠가 지금처럼 대우받지 못하게 될 때, 몇십년 후일지 모르지만, 그 때에나 어렴풋이 알 것이다.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그 때 생각하겠지.
'아, 무시당하는 사람에게도 자존심은 있고 감정도 있구나.'
3. 국민의 자존감을 극복하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이 일에 대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난 우리나라가 그렇게 무시당할 만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자조하지 않았으면 했다. 정확히 경기 다음날까지는.
그런데 이튿날 뜬 기사는 이런 내 생각을 처참히 무너뜨렸다. 유벤투스가 전후반을 40분, 하프타임을 10분으로 하자고 요구(=갑질) 했었다는 게 아닌가. 명문팀이라는 게 무슨 동네축구 하듯이 축구 룰까지 바꾼단 말인가. 늦게 온 건 자기들이다. 그래놓고 새벽에 떠나야 하니까 빨리 끝내자고 했다는 거다.
그들에겐 아무리 친선전이라도 최선을 다해 겨루겠다는 존중이 손톱만큼도 없었다.위약금 물고 경기 안 하면 된다는 협박을 했다는 걸 보면 말이다.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부들부들이 이런 거구나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행동한단 말인가? 그들은 축구가 하나의 외교라는 걸 모르는가? 알아서 그랬을까? 우리나라를 무시해서 그랬다면 자기들이 늦고, 자기들이 삐대고, 그래 놓고도 자기들이 화내면서 가는 수준은 도대체 어느 수준이란 말인가. 자기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떠나면서 '호날두 보고 싶으면 티켓값 줄게.'라고 하는 그 수준은 도대체..
우리나라는 '무시할 만한' 나라가 아니다. 요즘 세상에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따로 없듯이 강대국과 약소국도 따로 없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를 무시할 수준도 아니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똑똑하고, 문맹률이 0이다. 경제력이며 국민 수준이며 우리는 충분히 좋은 국가다. 자존심은 우리가 세워야 한다. 그들이 잘못한 거다.
나에게 현실 충격을 안겨준 이 경험은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국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은 책에서 배울 필요가 없는 거였다. 이런 뒤통수 한 방이면 되는 걸. 성인인 나도 상처받는 이 사태를 초등학생들에게 여과없이 느끼게 해준 그들이 너무 원망스럽다.
K리그를 스타 마케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이제야 실감했다. 그 사람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처지라니. 현실의 문제가 여실히 느껴졌다.
K리그를 충분히 존중받는 리그로,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리그로 만들고 싶다는 다짐이 드는 오늘이다.
스타 없어도 K리그가 충분히 흥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개 직장인인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꼭 뭐라도 할 것이다! 꼭!
<이 사건과 느낌을 희석 없이 정확히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썼습니다. 긴 글을 다 읽어주셨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