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그 실내화는 누가 숨겼을까.

아니 오늘 어떤 애가 실내화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거 아니야

그때까지만 해도 건성으로 들었다. 간헐적으로 하는 '응응' 추임새도 너무 대충 흘려듣는 바람에 박자가 맞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그 실내화를 애들이랑 선생님이 찾아다녔거든 여기저기..
응응..
근데 그 실내화가 내 신발 넣는 곳에 있었던 거 아니야.


아이의 학교엔 개인신발을 보관하는 사물함이 있다. 아이의 사물함에 잃어버린 실내화가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다급한 순간, 생각이 지나가는 속도는 정말 어마무시 해지는 모양이다. 다음 말이  이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얘가 남의 실내화를 숨겼다는 건가. 얘가 그런 장난을 할 만큼의 배포는 없는데. 그럼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건가? 아니라고 말은 똑바로 한 건가?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그 실내화가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선생님한테 말했어? 네가 한 거 아니라고?

마음이 조급했다. 바보처럼 아니라고 말 한번 못하고 억울하게 당한 건 아닐까? 분명하게 말을 했어야 했는데..


말을 똑 부러지게 못 하는 건 나였다. 어릴  또박또박 말대답을 잘해서 말문이 막혔던 동네 아줌마들에게 된통 혼이 곤 했다는데.. 그게 문제였을까? 아님 7월 생이었던 내가 유치원비 때문에 일 년이나 일찍 학교에 가면서, 적응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쯤이 시작이었을까? 아, 어쩌면 수업시간에 똑 부러지게 대답을 하며 잘난 척을 하면 친구들의 미움을 산다는 걸 안 중학교 시절이 시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늘 대충 얼버무렸다. 예의라는 이유로 내 주장을 삼갔고 말끝을 흐렸다. 대놓고 하는 공격에도 사람 좋은 척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하나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그저 넘겨버렸다.


나 혼자 지내면야 이런 일 쯤 그저 쓴웃음 뒤로 삼켜버리면 만이었지만 아이들이 커가니 문득문득 두려워졌다. 유전자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눈코입 같은 생김뿐 아니라 성향마저도 비슷해지는 녀석들을 보면 한숨이 났다.

자기 공을 가져간 친구에게 안된다는 한마디를 못했다. 친구들에게 놀자고 먼저 말을 건네지도, 하고 싶은 얘기를 시원하게 하지도 못다. 내가 참고 산 세월만큼 녀석들도 참고 살거라 생각하니 속이 답답해져 왔다.  험한 세상 속에서 녀석들도 나만큼이나 힘들고 속상하면 어쩌지!


아니. 말 못 했는데, 친구들이 다들 나는 그런 장난을 할 애가 아니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래서 다행히 누명을 벗었지. 근데 친구들이 다 나는 아니라고 하니깐 선생님이 "ㅈ이, 학교생활 잘했나 보네. 친구들이 다 믿어주는 것 보니"그러셔서 엄청 뿌듯하고 자랑스럽지 뭐야.

전개가 예상 밖이었다. 집에서와 달리 학교에서 착실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녀석의 행동 결백의 증거가 되어주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어린 친구들이 들의 성실함을 알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학생이라고 믿어 주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늘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말 못 하고 참는 나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이러하니 나는 늘 경계태세였고 긴장상태였다. 욕을 먹을 정도로 되바라지게 내 주장을 펼쳐서 안된다.  그렇지만 피해를 볼만큼 말 못 하고 참아서도 안 됐다. 상반된 주장 속 도대체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그 '정도'를 찾으려 애썼다. 또 못 찾고 헤맬 쯤엔 현명하지 못한 스스로를  타박하고 구박해 댔다. 래서 이 험한 세상 잘 살아낼 수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아니었나 보다. 세상은 내게 관심은 없을지언정 나를 이용할 정도로 사악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실내화 장난의 누명을 쓸 뻔하고도 아무 말 못 하는 아들을 '넌 그런 애가 아니야'라고 믿어줄 만큼의 관심과 따뜻함은 가진 그런 곳이었나 보다.


세상을 온통 핑크색으로 바꾸는 불가능한 소망을  가진 <핑크대왕 퍼시(영국동화)>에게 스승은 핑크색 렌즈를 가진 안경을 선물한다.  퍼시처럼 우리 모두 저마다 세상을 보는 다른 색 렌즈의 안경을 가졌겠지만 내가 가진 게 핑크색은 아니었던 건 확실한 듯하다. 10살 꼬맹이들 덕에 이런 색의 안경도 취할 수 있음을, 세상이 한편 따뜻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녀석이 그런 따뜻함을 경험해서, 참 다행이다.






작가의 이전글 당근에도 신의가 있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