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개시 (萬事開始) 서안

서안을 떠나며

by 마담 D

서안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조금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온몸이 쑤셨다. 평소 안 하던 등산을 했더니 몸이 놀란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마냥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랴부랴 짐을 싸고 마지막 샤워도 마쳤다. 나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A가 마지막으로 포옹을 해주었다. A는 서안에서 이틀 정도 더 있다가 상해로 갈 예정이라 했다.


"행운을 빌어. 몸 조심하고."


"응, 너도. 종종 연락해."


우리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하고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비록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건 아니지만 여행에서 처음 만난 룸메이트와 헤어지니 무척 아쉬웠다. 나름 하루의 마지막에 안부를 물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은 많은 만남과 오는 이별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로비에 짐을 맡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서안역에서 청두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해 두어 여유가 있었다. 저녁 9시 19분에 떠나는 야간열차였다. 덕분에 서안 시내를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


사실 서안 다음으로는 구채구를 갈 생각이었다. 중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자연경관인 구채구 풍경구는 야생 판다가 산다는 곳이다. 물론 이를 알게 된 건 L의 극찬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해 8월에 난 지진으로 길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소식을 듣고 혹시나 해서 숙소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질문해 보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그다음 목적지였던 청두로 곧장 향하게 되었다.


중국 역사에서 오래간 수도였던 서안의 시내에는 볼거리가 가득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과 서유기의 모델인 삼장법사가 경전을 보존했다는 대안탑, 그리고 공원을 끼고 있어 한적한 정취가 묻어 나오는 소안탑까지. 나는 그곳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화려한 대자은사, 소안탑 주변의 한적한 공원과 작은 박물관까지.


서안 한 바퀴를 돌아보자 기차시간이 다가왔다. 숙소에서 맡긴 짐을 찾아 서안역으로 향했다.


서안역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짐검사를 마치고 나와 승강장으로 향했다. 대기실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꽉 차 앉을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중국이다. 질서도 없고 규칙도 없다. 대기실에 앉을 곳이 의자만 있는 게 아니다. 바닥에 앉아서 음식을 까먹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차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느긋하게 앉아 핸드폰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것도 중국 말로.


"Sorry, 나 중국인 아니야."


영어로 그렇게 답을 하자 남자는 입을 떡 벌리더니 민망한 듯 웃기 시작했다.


"아, 미안. 난 네가 중국인인 줄 알았어. 어디 가?"


"청두. 기차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앉을 데가 없길래."


"하하, 그렇구나. 좋은 여행 되길 바라."


시답지 않은 말만 남긴 채 남자는 사라졌다. 그런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셀카를 찍었다. 도대체 나의 무엇이 현지인처럼 보였는지 궁금해서. 보통 여행객처럼 입기는 했어도 여기 사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나? 중국 사람들은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빨갛게 물들인 내 머리 탓일까? 아니면 주저 없이 바닥에 앉아있는 행동?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외국인으로 오해받기 일쑤였으니. 내 까무잡잡한 피부와 이목구비 때문에 한국에서도 지나가다가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한국인입니다, 하면 죄다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본다. 그리고 하나 같이 멋쩍게 웃는다. 우리나라 사람 아닌 줄 알았어! 하면서.


내 이국적인 외형은 엄마로부터 받은 것이다.


'네 엄마 눈이 커서 결혼한 거야!'


아버지는 늘 농담처럼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무꺼풀의 작은 눈에 공사 현장에서 그을린 피부를 가진 아버지는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한국 중년 남성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엄마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까무잡잡한 피부에 쌍꺼풀이 있는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우리 삼 남매는 그런 엄마의 눈에 살짝 길쭉한 아버지의 얼굴형을 닮았다.


'피부가 검은 게 좀 흠이지.'


'에이, 왜 그래? 기껏 이쁘게 낳아 놨는데.'


아버지는 나를 보면 단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꼭 한 마디씩 꼬집고 마는 아버지를 보며 엄마는 주저 없이 반박을 했다. 하지만 그런 말로는 아버지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네 다리는 날 닮았어야 했는데.'


내 다리가 지나치게 굵다면서 한탄을 하고야 만다. 살을 빼라는 말은 하도 들어 무감각해질 정도였다.


살이 찌면 너무 둔해 보인다, 여자애가 행동을 좀 조신하게 해야지, 화장이 너무 세 보인다, 같은, 내 외모에 대한 지적은 언제 어디서나 예고 없이 던져졌다.


그 화살들을 피하기 위해 나도 반박을 했다. 내 허벅지는 굵어서 더 멋져, 이 정도면 튼튼한 몸이지, 예쁘고 화려하게 하는 화장이 어때서, 같은. 그러면서도 매번 몸무게를 재며 흥미도 없는 헬스장에 다녔다. 거울을 보면, 아버지가 말했던 온갖 단점들만 보였다.


마치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내 몸의 모든 부분을 싫어했다.


셀카 속 내 얼굴을 보았다. 단출한 차림의 여행자의 얼굴에 어색하게 그려진 화장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게다가 생긴 걸로 현지 사람 취급을 받았다고 투덜거리고 있다니! 아버지의 말을 따라 아직도 내 외면에 집착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씻어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거울을 보면 생각이 바뀔 나를 알아 그만두었다. 표면적인 방법으로는 나를 바꿀 수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생각의 전환이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뱀처럼 허물을 벗어야 한다.


'아무도 외국인이라 생각 못하는 거면, 언어만 배우면 되겠네. 그럼 바가지는 안 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 웃겨서 낄낄거렸다.


'허벅지가 굵어서 이런 큰 배낭도 멜 수 있고. 장수하려면 튼튼한 허벅지가 필수라잖아.'


기차시간이 다 되어가면서 몰리는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짐을 등에이고도 일어날 수 있는 내 굵고 튼튼한 다리를 칭찬한다. 어제 산행에도 여전히 버티고 설 수 있는 내 두 다리가 부끄럽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혼자서도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한국을 떠나올 때는 아무것도 없던 내 표정에 여유가 생겨나고 있었다. 등 뒤에 가방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내 발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30분 연착된 기차가 들어왔다. 3등석 침대칸에 같이 자리하게 된 할머니들이 내 괴물 같은 짐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멋쩍게 웃는 나를 보며 할머니들은 손짓을 했다. 좁은 기차 칸 안, 바닥 가장 안쪽에 내 가방을 놓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기꺼이 주전부리 같은 것들을 내민다. 셰셰, 인사를 하며 이를 받아먹었다. 입가에 미소도 잊지 않았다.


기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여정의 첫 도시였던 서안이 멀어져 간다. 오래 머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동시에 새 도시에 대한 기대가 차올랐다.


그래, 나는 더 나아갈 수 있다.


무디게 뛰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박동한다. 온몸에 피가 돌았다. 죽어 있던 영혼에 생기가 스며들었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숨을 쉬고 있다. 아주 편하고, 느리게. 그렇게 비로소 나는 이 여행을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6인실 침대칸, 허리를 필 수 없는 중간 침대였다. 기차는 소음과 담배냄새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내게는 4성급 호텔과 다름없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이 모든 환경들을 받아들이면 된다.


밤은 깊어가고 기차는 달린다. 첫 발걸음을 뗀 서안을 떠나 나는 새로운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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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