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족거리
목청 큰 상인들의 목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눈앞은 별천지였다. 온갖 향신료가 코 끝을 찌른다. 처음 마셔보는 석류 주스의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서안의 명물, 회족거리에서 나는 온몸으로 낯선 감각을 즐겼다. 덕분에 유심을 사지 못해 의기소침해졌던 기분이 쏙 자취를 감췄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 보지만 카메라로는 거리의 생동감을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색 짙은 간장과 땅콩 소스에 버무린 국수, 향신료를 잔뜩 바른 양꼬치, 화덕에 구운 납작한 빵과 생과일을 다져 만든 철판 아이스크림까지! 그 외에도 장식품과 장난감, 낯선 공산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같은 여행객들도 있었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들도 있었다. 복잡한 시장 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쉼 없이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내가 그들의 생활에 녹아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회족거리는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아랍인들이 한족 여성과의 혼인을 통해 정착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리이다. 지금은 서안의 가장 중심지에 자리 잡은 유명 관광지이자 회족의 주 생활터가 된 이 거리의 기원은 서로 다른 두 민족이 가족을 이루면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룬 폐허와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물이었다.
가족의 형성은 두 문화의 융합을 만들어 냈고 그렇게 회족이라는 민족성이 부여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시작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 결합을 이루지 못했다. 법적 서류와 자식들로 엉성하게 이어져 있던 부모님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붕괴가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가족의 시작에는, 나의 탄생이 있었다.
1988년 크리스마스를 곧 앞둔 12월의 어느 날, 4.5kg의 건강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부모님은 그 해 5월에 결혼식을 올렸었다. 서로를 일생의 반려로 고른 데에 아이의 존재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는 태어났다. 어느 남자아이 못지않게 건강한 여자 아이로.
오죽 내가 컸으면 엄마의 좁은 골반을 지나갈 수 없어서 결국 제왕절개를 감행해야 했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축하합니다, 득녀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같이 기다리고 있던 삼촌과 함께 말없이 병원을 빠져나가 술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씁쓸한 소주를 들이켰다.
긴 수술 끝에 겨우 눈을 뜬 엄마가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남편도, 아이도 아닌 시어머니였다. 할머니는 불 같이 화를 냈다. 장손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구박하는 할머니에게 엄마는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떠나고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엄마는 고통과 설움을 삼켜냈다. 간호사가 내가 담긴 요람을 병실 침대 옆에 놓아주었다. 엄마는 그걸 발로 저 멀리 밀어 놓았다고 했다. 비난의 이유가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괜히 미웠었다고 했다.
'네 얼굴에서 내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는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
엄마는 그렇게 그때를 회상했다.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엄마는 나를 낳은 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항상 강조했다. 엄마에게 나와 내 동생들은 삭막한 결혼 생활에서 얻은 유일한 보석이었다.
그러나 나는 종종 나를 가지지 않았다면 엄마가 이 결혼을 추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엄마는 자기 일에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다. 십 대 때부터 광장시장에서 한복을 팔며 큰돈을 만졌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엄마의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돌았다.
만약 그때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가지지 않았다면, 엄마는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런 엄마를 집에 앉혀 둔 건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신념 탓이었다.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서툰 집안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신혼 초 아버지가 멋대로 끌고 들어온 삼촌까지 돌봐야 했다.
그러던 중 어렵게 낳은 첫 아이의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로 구박까지 들었다. 임신 중에 의사가 미리 성별을 언질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단연 아버지와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비상식적인 아들에 대한 열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신 중 고기를 많이 먹어서, 배의 모양새가, 혹은 그저 느낌에 아들일 거라고 믿었고 그 결과에 대한 실망감은 오롯이 엄마의 탓으로 돌아왔다.
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았다.
가족의 탄생이었다.
"너 혼자 여행을 왔다고? 정말 대단한 걸?!"
훠궈파티는 단출했다. 꼬치에 꿰인 여러 재료들을 육수에 담갔다 꺼내 먹는 방식이었다. 육류보다는 야채가 대부분이었지만 공짜인 걸 감안하면 나쁘지 않았다. 바에서 맥주를 주문해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같은 테이블에 있던 낯선 사람들과 실없는 잡담을 나누었다.
그중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중년 여성들이 나를 대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주머니들의 얼굴에서 엄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웃었다. 입을 열면 그간 참아왔던 투정거리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방으로 갔을 때, A는 미동 없이 자고 있었다. 간단한 세안을 하고 자리에 누워 나는 낯선 천장을 보았다. 정확히는 위층 침대의 밑바닥을. 그리고 멍하니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단편 영화처럼 머릿속에 흘러가는 하루가 꿈결에 흘러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들어 찍었던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대단할 것 없는 하루였지만 뭔가 엄청난 하루를 보낸 것처럼 글도 썼다.
다음으로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뭘 했고, 뭘 먹었고 하는 자질구래한 내용이었다. 답장은 기다릴 새도 없이 곧장 왔다. 그 찰나의 순간에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이혼 후, 엄마의 홀로서기는 위태로워 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야무져서 금방 좋아질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보템이 되어 줄 수 없었다. 우리는 종종 작은 상을 두고 같이 앉아 술잔을 같이 기울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작 속 안에 담긴 말들을 터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내가 기어이 떠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해, 딸. 잘 자.]
그래서 엄마는 걱정 대신에 애정표현을 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 표현에 왠지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동시에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아침에 봤던 엄마가 잘 기억나지 않아서, 당장이라도 돌아가 다시 엄마를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도 사랑해, 잘 자.]
나도 그 마음을 애정표현으로 대신했다. 천성이 무심한 딸이라 애교가 없다고 늘 섭섭하다 했던 엄마에게, 그렇게 생전 안 하던 낯간지러운 말을 한다. 하트가 가득 담긴 이모티콘도 보냈다.
할 일을 다 마치고, 마침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 편한 잠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느낄 새도 없이 피로는 나를 수면 아래로 밀어 넣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고집과 여러 감정으로 얼룩진 과거의 잔여물들이 잠결에 씻겨 내려간다.
그렇게 도피생활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