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중한 지금 이 순간

완주에서의 1박

by 본격감성허세남

아빠의 정년 퇴임이 현실이 됐다.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바로 그 단어다. 그런데 그 단어가 현실이 되다니. 세월은 계속 흐른다. 평소엔 잊고 살아가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집 냉장고에 과일이 차있어서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먹을 수 있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어려웠기에 그 꿈은 꿈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고, 아빠와 엄마는 늘 일을 하셔야 했다. 그렇게 한평생 고생만 하신 아빠를 위해 우리 4남매가 모여 깜짝 파티를 해드리기로 했다. 날짜를 정하고,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전북 완주군의 집으로 잡았다. 다 모이면 16명이나 되는 대가족이다 보니 집 전체를 빌려야 한다. 가족사진을 남기기 위해 다들 깔끔한 옷으로 입고 오기로 한 만큼 야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장소도 필요했는데 그런 모든 조건을 갖춘 집이었다.


우리의 깜짝 파티 날 날씨는 다행히도 무척이나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보다 환상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완연한 가을 날씨. 이래서 가을이 좋다. 하늘이 축복해줬나 보다.

사진 2017. 9. 17. 오전 11 05 13.jpg 기가 막힌 가을 날씨! 날씨가 열일한다.
사진 2017. 9. 16. 오후 2 40 32.jpg
사진 2017. 9. 16. 오후 2 41 48.jpg


우리 집이 가장 먼저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2호 누나네와 3호 누나네가 아빠 엄마를 모시고 오고, 마지막으로 1호 누나네가 도착하는 계획이었다. 당연히 아빠와 엄마는 도착하실 때까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시고 그저 2호와 3호 누나네만 함께 놀러 가는 줄 알고 계셨다.


먼저 도착한 우리가 짐을 풀고 다른 가족들을 기다리는 동안 수인이는 그저 신났다. 넓은 잔디밭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집 안 곳곳을 순찰하고, 이후에는 아빠 엄마와 손을 잡고 시골 동네 산책도 했다. 우리가 빌린 숙소는 완전히 산골에 있었다. 차를 타고 오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포장된 도로가 끝나고, 매우 좁은 골목길을 지나 비포장도로까지 지나야 도착하는 그런 곳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고립된 곳인 만큼 수인이에게는 최적이었다. 아무리 뛰어도, 아무리 소리 질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우리 세 가족 모두 가을을 마음껏 만끽했다. 흐뭇하다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단어인가 보다. 수인이와 즐겁게 놀고 나면 마음이 참 흐뭇해서 좋다.


사진 2017. 9. 16. 오후 2 53 01.jpg
사진 2017. 9. 16. 오후 3 05 30.jpg
사진 2017. 9. 16. 오후 2 59 57.jpg
사진 2017. 9. 16. 오후 2 54 55.jpg


오후가 되니 모든 가족들이 다 도착했다. 아빠와 엄마는 중간에 잠깐 눈치를 채신 듯 많이 놀라지는 않으셨지만 아무렴 어떠랴.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생 조카 4명은 그들끼리 놀기에 바쁘고, 수인이와 수인이보다 1살 어린 조카는 둘이서 노느라 바쁘고, 그동안에 어른들은 준비를 했다. 수인이는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한다. 더 어렸을 때는 낯을 가려서 사람들이 오면 하도 울어대서 아빠와 엄마가 옆에 꼭 붙어있어야 했지만 커갈수록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특히 1살 어린 동생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아기."

"아아."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런 정도. 하지만 이마를 들이대고, 눈을 가까이 가져가서 살펴보고, 가끔은 자기 것을 동생 주기도 하면서 정말 좋아한다. 역시 둘째를 낳아야 하나. 그런데 동생은 또 싫어하는 건 아닐지.


깜짝 파티인 만큼 이번에 많은 준비를 했다. 케이크도 직접 만들고, 감사패도 준비하고, 흔한 바비큐 대신에 뷔페식으로 하기 위해 4남매가 각각 나눠서 음식도 준비해 왔다. 다 차리니 굉장히 근사한 뷔페가 됐다. 쾌적한 실내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가지고 와서 자유롭게 먹으니 흔한 뷔페보다 훨씬 좋았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인데 색다른 경험이었달까. 역시 남매가 많으니 좋다. 클 때는 잘 몰랐지만 크고 나니 확실히 좋다.


아빠와 엄마도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셨나 보다. 정말 즐거워하셨다. 자식들로부터 감사패는 처음 받아보셨으니 더욱 좋으셨겠지? 또 한 번 흐뭇했던 순간이었다. 나중에 수인이도 아빠 엄마에게 이런 걸 해주려나. 그런데 수인이는 혼자인데 어쩌지. 역시 둘째를 낳아야 하나.


사진 2017. 9. 16. 오후 5 10 23.jpg
사진 2017. 9. 16. 오후 5 56 18.jpg
사진 2017. 9. 16. 오후 5 13 29.jpg 자식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으신 우리 아빠 엄마


올해 허리 재수술을 받으신 엄마는 예전처럼 거동이 자유롭지는 못하시다. 정년 퇴임을 해서 이제 좀 편하게 쉬시려나 했던 우리 아빠는 최근에 무서운 병 진단을 받으셨다. 당장 심하게 아프신 건 아니지만 마음이 착잡하다. 이미 그렇게 된 걸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살면서 여실히 느끼는 것,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 같다. 뻔한 말이지만 그걸 경험하기 전까지는 결코 체감하지 못하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올해 초에 하와이에 다녀온 것도, 이렇게 깜짝 파티를 하는 것도, 더 시간이 지나면 하고 싶어도 못 할지도 모른다. 수인이와의 시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수인이는 쑥쑥 크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리 부부도 점점 더 바빠진다. 수인이와 함께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언젠가는 뜻대로 안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더 많이 함께 하고, 더 많은 걸 보여주고 싶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번에 2장의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뿌듯한 사진이다. 역시 나도 나이를 많이 먹은 건가. 억지로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앞으로 가족들끼리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본다.


완주에서의 밤, 숙소 밖으로 나오니 놀랍게도 반딧불이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을 초록빛을 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반딧불이를 본 건 처음이었다.


사진 2017. 9. 16. 오후 5 03 38.jpg
사진 2017. 9. 17. 오전 11 28 52.jpg
keyword
이전 04화해금강 잔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