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빛났던 수인이
에펠탑 야경을 보러 온 여파가 다음날까지 남아있어서 이날은 평소보다 더 늦게 집에서 나왔다. 느릿느릿 준비를 해서 나온 후엔 언제나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빵집에 들러서 바게뜨를 사고, 오늘의 목적지인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역시나 힘들었다. 엘리베이터 없음, 에어컨 없음, 사람 많음. 이 3종 세트를 모두 경험해야 갈 수 있는 곳. 게다가 토요일이라 단체 관광객이 그렇게 많았는지 파리 그 어느 곳보다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럴 때 유모차가 가는데 길을 조금이라도 비켜주기를 기대하는 건 사치다. 대신 몽마르트르 언덕과 그 꼭대기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눈이 부시게 멋졌다. 참 애증의 도시다. 일정 내내 이렇게 병 주고 약주 고를 반복하다니. 날씨 역시 그랬다. 파리에 온 이후 이날이 가장 더웠다. 그래 봤자 30도 정도라 서울의 여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햇빛이 워낙 뜨거우니 금방 지치는 날씨였다. 반면에 하늘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파랬다. 유럽 여행을 와서 날씨가 계속 좋았지만 이날이 절정이었다. 멈춰 서서 보기엔 참 아름답고 기분이 좋은데 이동을 하면 힘들어지는 묘한 상황이 계속됐다.
여행에 와서 활기차게 웃던 원영이도 이날은 피곤했는지 잘 웃지 않았다. 아직 피로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안 그래도 땀이 많은 아이가 사람들로 가득 찬 푸니쿨라를 타고 그랬으니 그럴 만도 하지. 미안해 원영아. 아빠도 엄마도 피곤했단다. 조금만 이해해 주길.
수인이만은 예외였다. 전날 그렇게 늦게 들어와서 잤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발해져서 다시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수인이가 여행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부분은 주로 다음의 3가지다. 아는 것(랜드마크), 놀이터나 놀이기구, 그리고 물. 몽마르트르 언덕엔 수인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크레쾨르가 있고, 그 아래엔 회전목마까지 있으니 2가지나 충족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피곤한데 혼자서 생기가 넘쳤다.
"사크레쾨르! 멋지다."
"나 회전목마 탈래!"
숙소로 돌아온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오는 우버에선 잘 것처럼 하더니 도착해서 30분가량 재우려고 시도해도 자지 않아서 결국 다시 집 근처 놀이터로 갔는데 어찌나 신나게 놀던지. 매일 가는 놀이터인데도 그렇게 재밌니. 관리인이 와서 문을 닫을 테니 나가라고 할 때까지 열과 성을 다 해서 놀았다. 대단하다 우리 딸. 완전 여행에 최적화된 아이다. 멋져. 아빠가 괜히 뿌듯해.
여행에도 조기 교육은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부부와 함께 국내외를 워낙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이제는 완전히 프로 여행러가 된 우리 딸. 유튜브로 세계의 도시 풍경을 즐겨보질 않나, 우리가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을 수시로 보지를 않나, 갱신해서 못쓰게 된 구 여권을 보물상자에 담아두고 자주 가지고 놀지를 않나, 게다가 여행지에 가면 아프던 것도 금방 나아버리니. 잠도 잘 자고 먹는 것도 잘 먹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덕분에 지금까지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다. 부디 원영이도 누나를 많이 닮기를 바란다. 지금 봐서는 원영이 역시 만만치 않은 것 같긴 해서 걱정은 크게 되지 않는다.
당장 수인이가 어린이집만 가도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시간은 많이 줄어든다. 이번에 유럽 여행 계획을 짤 때도 어린이집 필수 출석 일수를 계산해가며 그것에 맞춰야 했는데, 몇 년 후에 학교를 가게 된다면 얼마나 더 어려워질까. 역시 가장 소중한 건 시간이다. 시간이 있을 때 더 많이 다니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남들은 조기교육으로 무언가를 배우게 하고 그런다는데 우리 부부는 여행으로 조기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원영이 역시도 그럴 계획이다. 나중에 후회를 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최대한 즐겁게 산다면 적어도 아쉬움은 남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출국일을 제외하면 유럽 여행도 딱 하루 남았다. 사실 파리가 이렇네 저렇네 해도 어쨌든 떠나와서 좋고, 마음엔 여유가 있으며, 눈도 즐겁다. 마지막 날은 더욱 눈부시게 보내련다. 끝까지 잘 부탁해 수인아, 원영아. 무리한 다음 날에도 아프지 않고 잘 있어줘서 고마워.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쌓아갈 수 있는 건 모두 너희들 덕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