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여유롭게 즐기는 법
파리에서의 사실상 마지막 날. 이날을 위해 아껴뒀던 센강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마침 어제까지만 해도 덥던 날씨가 살짝 시원할 정도로 좋아져서 유람선 타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파리에서 참 즐겁기도 힘들기도 했지만 끝까지 날씨 하나만큼은 완벽해서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런 행운이!
본격적으로 파리 시내를 돌아보기 시작한 둘째 날, 시작은 센강이었고 그 분위기에 무척이나 감탄했었는데, 마지막 날도 센강에서 마무리한다. 그때는 시작이라 여기저기 무엇이 있는지 잘 몰랐지만 이날은 다 아는 상태에서 유람선을 타니 여기저기가 더 새롭게 보이고 재미있었다. 전날 미리 예약하고 오전부터 와서 유람선을 탄 보람이 있었다.
"수인아 우리 저기 갔었지. 뭐지?"
"오르셰 미술관!"
"수인아 저기 에펠탑 보여. 봐봐."
"어디? 어디? 저기 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 단순한 진리는 언제나 유효하다.
유람선을 선택할 때 우리가 내건 조건은 다음의 2가지였다.
1) 버스로 한 번에 가거나 지하철로 한 번에 갈 것. 절대로 갈아타지 않기
2) 굳이 유명한 곳보다 덜 알려졌더라도 여유로운 곳
그렇게 선택한 곳이 퐁 뇌프 역에 있는 업체였다. 유명한 바토 무슈나 바토 파리지앵을 탈 이유 있나. 갈아타지 않고 지하철 7호선으로 한 번에 갈 수 있다면 지하철역에서 잠깐 유모차 들고 고생하는 건 괜찮다. 파리에서 그렇게 여러 날을 보냈으면 그 정도는 충분히 익숙하다. 갈아타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까다롭게 고른 덕분에 유람선을 타고 보낸 이 시간은 파리에서 오랜만에 참으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래, 사실 파리는 이렇게 좋은 곳인데. 여유롭게 즐기는 법을 이제야 깨닫다니. 갈아타서 가야만 하는 먼 곳이라면 차라리 조금 비싸더라도 우버를 불러서 가면 되는데, 아니면 어떻게든 좀 더 걸리더라도 되도록이면 버스를 타면 되는데. 파리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법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날씨도 선선하겠다, 사람도 그리 많이 없겠다, 수인이는 완전히 신이 났다.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났다. 배가 움직이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고, 주변에 펼쳐진 풍경에 눈도 즐거우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와 수인이는 열심히 그 순간을 즐기고, 아내는 원영이를 안고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원영이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쌔근쌔근 편하게 자던 원영이의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땀이 워낙 많은 원영이도 시원하게 잘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날씨였다.
요즘 방귀에 맛을 들인 수인이는 배에서 방귀를 뀐다며 포즈를 취하길래 사진 한 장 찍어 주었다. 물론 진짜 뀌는 건 아니고 입으로 "뿌웅." 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대응은 해줘야 한다. "아우 냄새!" 나중에 살펴보니 수인이가 방귀를 뀌는 동안 저 뒤에서 외국인 아이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야 진짜로 뀐 거 아니거든. 오해하지 말아 줘.
유람선은 1시간 정도 탔던 것 같다. 참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이었다. 원래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법. 덕분에 파리가 조금 더 아름답게 남을 수 있었다.
"재밌었어요!"
유람선에서 내린 후 수인이가외친 그 말에 우리 부부도 적극 공감했다. 원영이도 그랬을 것이라 믿는다.
숙소로 돌아가기가 아쉬워 가는 길에 뤽상부르 정원에 들렀다. 이동은 역시나 버스다. 둘째 날 갔던 튈르리 정원도 좋았지만, 뤽상부르 정원도 참 크고 여유롭고 좋았다. 파리엔 이런 공원이 많다. 여유롭게 즐기려면 공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는데, 우리 가족이 유난히 힘들었던 넷째 날과 다섯째 날엔 공원에서의 시간이 없었다. 욕심이었나 보다. 아이와 함께 다닐 땐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을, 그럼 파리가 조금 더 좋게 남았을 텐데. 이것 역시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뤽상부르 정원을 걷다가 놀이터가 있기에 들어가려 했더니 심지어 입장료를 내라고 했다. 세계 많은 곳을 가봤지만 놀이동산도 아닌 놀이터에 입장료를 내라고 하는 곳은 여기가 처음이다. 참 파리 답다고 할까. 그런데도 사람이 워낙 많아서 수인이가 많이 놀지는 못했다. 평소와 다르게 오전부터 일찍 유람선을 탄 덕분에 졸음까지 오면서 짜증 지수가 상승했는지 수인이는 중간에 크게 울기도 했다. 끝까지 옥의 티로 남아버린 뤽상부르 정원의 놀이터. 역시 애증의 도시답다.
근처 판테온에 갈까 하다가 가볍게 포기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 곳 하나 안 가면 어떠하리. 오전부터 여유로운 마음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절로 너그러워져서 아무런 아쉬움 없이 즐겁게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버스다. 내려서 조금 더 걷더라도 우리의 평화를 위해 버스가 좋다.
오는 길에 밥과 몇 가지 먹거리를 사서 숙소에 남은 마지막 음식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요즘은 아시아 상점들이 많은 덕분에 세계 웬만한 곳에 가도 수인이 밥 먹이기에 큰 어려움은 없어서 좋다. 옛날처럼 아시아 슈퍼를 찾아 헤멜 필요도 없으니 참 편리해진 세상이다. 게다가 숙소 1층의 모노프리 덕분에 묵는 내내 먹거리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숙소를 잡을 때 그것을 고려한 건 아니었으니 이것 역시 큰 행운이랄까. 날씨, 숙소. 이 2가지는 파리가 우리 가족에게 준 큰 선물이었던 것 같다. 파리는 아쉽지 않은데 이 숙소는 쪼끔 아쉽네.
밥도 든든하게 먹고, 아이들은 씻은 후 일찍 자고, 우리는 떠나기 위해 미리 짐을 쌌다.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약 2주. 이제 돌아갈 날이 돌아왔다. 일탈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기에 일탈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이겠지. 조용히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