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만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여행의 마지막 날엔 보통 특별한 일이 없다. 오전 체크아웃, 공항 이동, 비행기 탑승 후 귀국. 주로 이 순서로 금방 지나가게 마련인데 이날은 달랐다. 비행기 탑승 시각이 저녁 9시, 체크아웃이 다행히 늦은 덕분에 12시가 다 돼서 숙소에서 나와서 5시에는 차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한다 하더라도 무려 5시간가량이 남은 상황이었다. 아이 둘과 함께 많은 짐을 이끌고 어딘가를 가기엔 어렵기에 일단 파리에 체류하는 내내 잘 이용했던 놀이터로 향했다. 수인이는 마지막까지 놀이터에서 열과 성을 다 해 놀았다. 매일같이 가는 같은 놀이터인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지만 아무튼 잘 놀았으니 다행이다.
전에도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파리에서 우리에게 특히 좋은 기억을 안겨준 세 곳이 숙소, 놀이터, 그리고 숙소 바로 앞 빵집이었다. 아쉽게도 빵집이 월요일 휴무라 마지막 날에 들러서 인사를 하지 못했다. 맛은 당연하고 그 외에 Trancher 같은 프랑스어 단어도 알려주고(바게뜨 슬라이스로 썰어달라는 말), 수인이에게 시식용 빵도 주면서 친절했던 곳인데.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바게뜨 사주세요."
아침마다 수인이가 이렇게 말하면 자연스레 들러서 바게뜨 빵을 사던 곳이었는데. 서울 집 바로 앞에는 우리 유러피안 유수인이 즐길만한 바게뜨 맛집이 없어서 아쉽다.
떠나기 전 마지막 점심으로 근처 태국 식당에서 이것저것 주문을 해서 먹었다. 날씨가 하루 만에 급격하게 서늘해졌다. 유모차에서 잘 자지 않는 원영이가 웬일로 잠에 드는 효도를 해줘서 혹시라도 춥지 않도록 꽁꽁 싸매 줬다. 덕분에 오랜만에 평화롭게 마지막 점심을 즐길 수 있었다.
근처 쇼핑몰로 이동해 장난감 가게 구경 좀 하다가 조금 이른 시간에 공항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어쩌지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금방 수속을 마치고 면세 구역 안으로 들어가서는 내내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라운지가 상당히 크고 넓은 데다가 음식도 좋아서 참 마음에 들더라. 귀국하는 비행기 역시 매우 편안했다. 이륙 후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밤잠을 자고, 우리 역시 누워서 잘 왔다. 돈의 힘은 참 대단했다. 비록 언제 또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를 비즈니스 클래스이긴 하지만. 앞으로 돈 많이 벌어야겠다.
그렇게 꿈만 같았던 시간이 지났다. 정말 말 그대로 '꿈' 같았다. 3박 4일 정도의 짧은 여행이 아닌 2주가량의 꽤 긴 일정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내일에 대한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오늘을 즐겼고, 가족과 함께 모든 시간을 온전히 보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저녁에는 서울에서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도 보냈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티비는 켜지도 않았다. 지인도 없고 멀리 떠나와서 챙겨야 할 것도 없으니 온전히 우리 스스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이것이야말로 멀리 여행을 떠나야만 느낄 수 있는 좋은 점이다. 게다가 날씨까지 일정 내내 완벽했으니 얼마나 좋은 시간이었는지. 과연 앞으로 우리 가족의 삶에 이런 시간이 또 올 수 있을까? 그런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정말 굉장히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전에 수인이와 처음으로 한 달 독일 여행을 다녀왔을 때가 기억난다. (https://brunch.co.kr/@dayemotion/132) 그때와 마찬가지로 넷 중 한 명도 아프지 않았고, 약도 하나도 쓰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하는 장기 여행이 처음이 아닌 만큼 예전만큼 감개무량하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보다는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크다. 그래도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원영이 역시 함께 여행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여행은 계속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긴 점이다. 길든 짧든, 국내든 해외든 기회만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행을 떠나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바르셀로나, 파리. 이번에 우리 가족이 경험한 두 도시 중에서 훨씬 더 좋았던 곳은 바르셀로나였다. 그런데 돌아와서 어디에 다녀왔다고 말할 때 더 말할 거리가 많은 곳은 파리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파리의 랜드마크들은 강력했다. 애증의 도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수인이와 이런 대화를 자주 했다.
"수인아, 우리 여행 가서 어디 어디 갔지?"
"음, 사그라다 파밀리아, 구엘 공원,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오르셰 미술관, 개선문, 사크르쾨르!"
어린이집에 가서도 저렇게 잘 말하고, 심지어 오르셰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상당히 뿌듯하다. 수인이는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정확히 기억했다. 심지어 어디서 무얼 먹고 어떤 것을 했는지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는 또 새로운 곳을 가자고 말한다.
"아빠 아마존은 비행기 타고 가야 해요?"
"응 멀어서 비행기 타야 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도?"
"그럼 거기도 비행기 타야지."
"나 다 가고 싶어. 만리장성,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머라이언, 마추픽추, 스위스 알프스."
"어디를 제일 가고 싶어?"
"다 가고 싶어."
"원영이는 어떻게 할까? 데리고 갈까?"
"아니."
"그럼 원영이 혼자 집에 둬서 울면 어떻게 해?"
"안돼. 데리고 가자!"
조기 교육의 성과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아빠의 방랑벽을 닮은 채로 태어난 건가. 여행을 다녀온 후 이전보다 국기 카드를 더욱 즐겨 보고, 어린이집에서는 세계 유명 랜드마크 맞추기 퀴즈를 모두 다 맞춰버리는 내 딸.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되는 만큼 아빠 엄마가 열심히 함께 다닐게.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여행을 가고 싶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못 갈 수 있을 거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