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지 않았으면 없었을 이야기

독일 여행 마무리

by 본격감성허세남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무사히 돌아왔다. 총 23박 25일. 셋 중 한 명도 아프지 않았고, 약도 하나도 쓰지 않았다. 수인이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굉장히 얌전했다. 이륙 후 1시간 정도 놀았고, 착륙 전 1시간 30분 정도 놀았고, 나머지는 잤다. 중간에 잠깐 깨서 후앵 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잠들었다. 그렇게 우리 여행은 끝났다. 떠나기 전에도 가을이었는데 돌아와서도 가을이다. 계절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수인이는 그동안에도 많이 자랐다. 더 잘 기어 다니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더 많이 내고, 아빠 엄마의 말에 조금 더 반응한다. 아이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간다.


참으로 꿈같은 시간이었다. 마음껏 게으름 피우고, 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보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고, 수인이와 함께 웃었다. 일정의 2/3 가량은 날씨도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에 더욱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0세 아이와 유럽여행이라니. 떠나기 전부터 걱정이 굉장히 많았다. 주변의 우려도 많았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집, 돌잔치 준비, 회사 일 문제 등 주변 환경의 문제점들도 있었다. 하지만 과감하게 시작했기에 그런 꿈같은 나날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끝이 크게 아쉽지는 않다. 여행이라는 것은 어차피 일탈이고, 일탈이 계속될 수는 없기에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면 독일에서의 꿈같은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우리 부부도 떠나기 전에 많이 흔들렸다. 그래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던 건 우리 딸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난 여행은 온전히 수인이 덕분이다. 정말 세상에 둘도 없을 우리 효녀. 독일에 갈 때와 올 때 모두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 아이는 우리 수인이 밖에 없었다. 그런 여행을 무사히 마쳤으니 뿌듯함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차오른다.


0살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 비결은 딱 하나인 것 같다. 욕심을 버리면 된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심을 다 버리고, 그냥 떠난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한다. 축덕후인 내가 뮌헨에 갔지만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경기는 못 봤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공연이 있더라도 못 보고, 수많은 미술관들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드레스덴 야경이 멋있다는데 기차를 늦게 탈 경우 수인이 컨디션이 걱정되어 못 봤다. 이런 모든 것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서 상황에 맞게 적절히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면 아이와 함께 여행하기도 잘 즐길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어렵다. 맞다. 가끔 나도 어려웠다.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여기까지 와서 이런 것도 못하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수인이의 얼굴을 보면 그 모든 것들이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수인이만 편하다면 사소한 욕심쯤은 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쨌든 나는 한국에서의 일상에서 떠나와 마음 편한 상태니까 그것 만으로도 참 좋다는 그런 긍정적인 생각. 이게 바로 아이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나 혼자라면 절대로 안될 거다. 아빠니까 가능했다.


여행뿐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비슷하게 내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아이에게 투자해야 한다. 그 과정은 내 욕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힘들고, 적을수록 쉽다. 나도 이제 1년 정도 겪었지만 저것 하나만큼은 앞으로도 확실할 것 같다. 그러면서 원래 하고 싶었던 몇몇 것들은 얻을 수 있겠지. 뉘른베르크에서 수인이가 잘 때 먹은 엄청난 맥주와 소시지, 힘들게 갔지만 참 좋았던 드레스덴처럼 몇몇 욕심은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버렸던 것이기에 그런 것일수록 즐거움은 더 크다는 건 이번에 확실히 느꼈다. 덕분에 그런 즐거움들을 소중하게 간직한 채 앞으로 수인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20161113_163550.jpg 독일에서 우리가 방문한 도시들


이번 여행이 더 좋았던 건 그 장소가 독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Baby', '유기농'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엄청나게 비싸지는 수많은 것들이 독일에서는 굉장히 저렴하고 다양했다. 기저귀는 한국에서 귀족 기저귀라는 몰텍스 기저귀를 굉장히 저렴하게 사서 잘 썼고, 이유식들은 HIPP으로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으며, 과자도 한 봉지에 1유로도 안 하는 가격에 열심히 사서 먹었다. 유아용 크림도 좋고, 공원도 좋고, 유모차 타고 기차/버스 등을 타기에도 정말 편하고, 주변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유모차를 들어주고 하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아이와 함께 생활하기에 독일은 천국이었다. 그만큼 독일에서 몇 년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기도 했다. 어차피 짧게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것들이 좋아 보이는 법, 독일에도 내가 못 보는 좋지 않은 점들이 많이 있을 거다. 하지만 저것들 만으로도 수인이와 함께 살아가기에는 참 좋은 곳이 독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언젠가 꼭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아니면 최소한 수인이가 더 크면 여행이라도 다시 오고 싶다.


이제 다시 한국에서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긴 시간을 출퇴근에 보내고, 때로는 일 때문에 수인이 얼굴도 자주 못 보고 그러겠지. 사실 이 점이 가장 아쉽다. 멋진 풍경들을 못 보고 맛있는 맥주를 못 마셔서 아쉬운 것보다 수인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쉽다. 좀 더 어릴 때는 휴가를 쓰고 어딘가를 간다는 점이 좋았는데, 이제는 휴가를 쓰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점이 더 좋아졌다. 설사 서울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인이가 태어난 후에 이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지난 25일이 더욱 꿈같고 소중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환경도 조금씩 변해가겠지? 흔히들 '뽕'이라고 하나. 여행 뽕을 맞았으니 이제 다시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다음엔 어디를 갈까?"

"어이구. 이제 아주 자신감이 생기셨구먼."

"돈 벌어서 뭐하나! 수인이랑 놀러 가야지!"


벌써부터 아내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독일 여행은 끝났지만 수인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또다시 새로 시작될 거다.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건강한 아이라 참 다행이야.


고마웠어, 수인아. 너는 기억하지 못할 독일에서의 시간들, 나중에 크면 글로라도 꼭 다시 읽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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