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로망이다

대책 없이 떠난 첫 유럽 배낭여행

by 본격감성허세남

유럽 배낭여행은 내 오랜 로망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언젠가부터 유럽 배낭여행은 더 늙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의무 또는 짐 같은 것이었다.


로망
[명사]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


그렇다. 로망은 이상이다. 배낭여행을 간다면 반드시 유럽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그냥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가면 되는 것이다. 마침 유럽에는 유레일 패스라는 제도도 있었다. 그 패스 하나만 있다면 기차를 타고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했다. 아, 그것이야말로 바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그럼 그 넓은 유럽 어디를 가야 할까? 애당초 추상적인 이상향으로 시작된 유럽 여행이기에 그런 구체적인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한 노래로 연결이 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정말 좋아하던 하림이라는 가수의 노래 <출국>. <출국>은 하림 1집 앨범의 타이틀곡이지만 2번 트랙이다. 1번 트랙은 <열한 시간 삼십 분의 깊은 잠>인데 기내 방송을 그대로 녹음한 것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비행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아시아나 항공 541편이며 오늘 독일까지 비행시간은 이륙 후 11시간 30분이 소요되겠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좌석 벨트를 착용해 주시고...


이어서 잠시 음악이 연주되다가 2번 트랙으로 넘어가 바로 명곡 <출국>이 이어진다. 사실상 1번 트랙 전체가 전주인 셈이다. 수도 없이 들었던 바로 그 앨범 덕분에 내 유럽 여행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정말 우연한 기회에 생전 처음 보는 동문회 선배 말을 듣고 전재산 160만 원을 주식에 투자해서 100% 수익이 난 덕분에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대학 졸업 전 마지막 방학, 인턴을 알아볼 것이냐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내 로망이나 실현하자 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당연히 아시아나 항공, 프랑크푸르트 왕복이었다. 그때는 인아웃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프랑크푸르트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드디어 하림 1집 앨범 1번 트랙에 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뿐이었다.


프랑크푸르트로 출국하던 날


항공권을 사고, 유레일 글로벌 패스를 샀다. 이 2가지가 있으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가방도 일부러 배낭으로 챙겼다. 캐리어라는 건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배낭여행이니 당연히 배낭을 가져가야지? 배낭을 사기는 아까워서 매형에게 큰 배낭을 빌렸다.


2007년 12월 26일, 드디어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출발. 하림 앨범의 그 안내방송과 비슷하게 나오는 안내방송에 얼마나 전율을 했던지. 지금은 3~4시간 비행만 돼도 아주 질려하지만 그때는 11시간이 넘는 비행 마저 순식간에 흘러갔다. 밥 먹고, 영화 보고, 여행 책자 잠깐 보고, 또 영화 보고, 또 밥 먹고. 잠잘 시간이 있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문제는 프랑크푸르트에 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짐을 찾은 후 공항 철도 쪽으로 가서 역무원에게 영어로 대략 이런 것을 물어보았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무조건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야 했다.


"내 유레일 패스를 활성화시키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저기 매표창구로 가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대략 이 정도의 간단한 대화였다. 짐을 챙겨 매표창구를 찾아가려 하는데 옆에서 두 명의 여성 한국인 여행객들이 나에게 물어왔다.


"저기, 한국 분이세요? 영어 잘하시는 것 같은데."

"네? 한국인 맞아요. (영어 못하는데..)"

"저희 이제 내렸는데 잘 몰라서 그러거든요. 같이 가도 될까요?"

"그러시죠.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함께 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함께 가게 되었다. 생각보다 순조롭게(독일에 안내가 잘 되어 있는 덕분이다 물론) 유레일 패스 활성화를 시키고, 프랑크푸르트 시내로 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어디서 묵으세요? 저희는 한인 민박에 묵어요."

"아... 그러고 보니 저는 예약을 안 했네요."

"그럼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아마 현장에서 말하면 될 거예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 일단 같이 가보고 안되면 다른 곳 찾아볼게요."


황당하게 숙소 예약조차 하지 않았었다. 이미 밖은 깜깜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지. 다행히 그 한인 민박에 자리가 있어서 묵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정말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은 다들 많이 안 본다, 프랑크푸르트는 여행 거리가 정말 없다, 유럽에는 저가항공이라는 것이 상당히 발달돼 있어서 꼭 기차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도시에 가면 반드시 관광 안내소를 찾아서 지도를 챙겨라, 최소한 다음 도시 숙소 예약은 이전 도시에서 해야 한다, 유레일 패스를 이용하더라도 열차 예약은 반드시 해야 한다 등등. 아마 공항에서 은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첫날 잘 곳도 찾기 힘들었을 거고, 이후 내 여행도 엄청 달라졌을 거다. 세계 어디서든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참 운도 좋았지.




이후 약 한 달 동안의 유럽여행은 아래 지도에 나타나듯이 정말 제멋대로 진행됐다. 내 로망이었던 프랑크푸르트는 잠만 자고 다음날 일찍 베를린으로 떠났고, 함부르크에서 바로 빈으로 갔다가 다음엔 바로 파리로 가는 등 무리한 일정도 계속 이어졌다. 로마에서 바르셀로나로 갈 때 저가항공을 처음 타보고 신세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젊은 날의 나는 정말 대책 없이 살았던 것 같다. 전재산을 모르는 사람 보고 투자한 것부터, 혼자 가는 첫 자유여행인데 목적지는 무작정 프랑크푸르트이고, 첫날 숙소 예약조차 하지 않고, 유럽에서도 로망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무리하게 이동해서 찾아가고, 저가항공을 이용하던 날은 로마의 작은 공항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고. 지금은 절대 못 할 그런 짓들을 참 많이 하며 살았다. 남들로부터 미쳤다고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건 그렇다. 내가 봐도 그런 걸. 용케도 잘 살아남았다. 대견하긴 하다만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말기를. 결과가 좋다고 모든 것이 좋은 건 아니다.


그래도 가끔 그때의 그 자유와 겁 없음이 그립긴 하다. 로망이었던 유럽 배낭여행은 막연한 상상 그대로 내게 무한한 자유와 즐거움을 선사했고, 덕분에 이후에 더 많은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나를 전혀 모르겠지만 가수 하림 씨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하림 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할 걸. 아무튼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용기 있게 해외에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