갔던 곳 또 가도 즐겁지

타이페이에서 빈둥대기

by 본격감성허세남

송산 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은 후 최소한의 금액을 환전한다. 그 돈으로 교통카드 충전을 한 후 MRT를 타고 송지앙난징(Songjian Nanjing)역에 내린다. 내려서 밖으로 나오면 늘 보던 시티은행이 있다. ATM으로 가서 원하는 만큼 돈을 찾으면 왠지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차피 숙소는 예약을 했기 때문에 주로 먹을 비용으로 하루에 6~7만 원이면 여유롭다.


은행을 나온 후 익숙한 길을 걸어서 <하오지 단짜이멘>으로 간다. 깔끔하고 맛있는 단짜이멘 한 그릇을 다 먹으면 이윽고 내가 타이페이에 온 실감이 난다.


'아, 다시 왔구나! 이번에도 재미있게 놀아보자.'


어찌 보면 제주도의 고기국수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더 깔끔한 맛이 딱 내 스타일, 이 작은 국수 한 그릇이 나에게는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식당에는 다른 메뉴들도 정말 많지만 먹어본 적도, 앞으로 먹을 계획도 없다. 나에겐 오로지 단짜이멘만이 목적일 뿐. 과장 조금 보태면 이거 먹으려고 타이페이에 온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맛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저 타이페이가 그리울 때 생각나는 맛이랄까? 옛날에 기차 타면 늘 먹던 티피(초코볼) 같은 거다 나에겐.


하오지 단짜이멘


단짜이멘을 먹고 난 후 다시 MRT를 타고 예약해둔 숙소로 이동해서 짐을 풀고 거리로 나온다. 여기까지가 대만의 타이페이에 가면 내가 늘 하는 루틴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마치면 이윽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여행의 설렘, 기대감 그런 건 없다. 하지만 매우 편안하고 좋다.


처음에 타이페이에 간 건 2009년이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원래는 싱가포르로 여행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싱가포르는 비행시간도 6시간가량으로 많이 걸리고, 비행기 출발 시간도 모두 늦은 저녁이 아닌가. 밤 비행기라니, 나 혼자서도 힘든데 엄마 아빠를 모시고는 더더욱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대만이었다. 무비자에, 비행시간도 3시간 이내로 좋고, 찾아보니 나름 볼거리도 있어 보였다. 그 첫 방문에서 너무나도 인상이 좋아서 그 뒤로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5번 정도를 더 갔다. 어떤 해에는 1년에 두 번 가기도 하고 그랬으니. 가끔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다녀오곤 하는 그런 부담 없는 곳이 되었다.




"한 도시를 5~6번이나 여행하면 볼거리가 있니?"

"음... 있지."

"타이페이에 뭐가 좋은데?"

"맛있어, 그리고 편해."

"볼거리는?"

"뭘 그렇게 봐. 그냥 가는 거지."

"아, 그래;;"


지인과 타이페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 신기하다는 표정과 함께.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서울에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그런데 한 도시를 1~2번 가 보고 어떻게 다 알겠어. 매번 바뀌고 매번 새로운 것이 보이는 걸.


처음에 타이페이에 갔을 때는 101 빌딩이나 용산사, 중정기념관 등 볼거리를 주로 찾아다녔는데 2번째부터는 그런 볼거리에서 거의 벗어나서 그냥 나 가고 싶은 대로 다녔다. 재미있게도 그러다 보니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혀 정보 없는 음식점도 가보고, 좋아하는 펑리수 브랜드도 생기고(수신방 펑리수 최고!!), 단짜이멘이나 밀크티도 좋아하게 되고, 딘타이펑은 지점별로 구분도 좀 하게 되고, 일부러 대만 음식을 먹기보다는 맛있는 걸 찾아서 먹으러 다니게도 되었다. 한 번은 타이페이에 가서 인도 카레를 맛있게 먹었던 적도 있다. 다 먹는 거다. 그렇다, 내가 타이페이에 결정적으로 반하게 된 계기가 먹는 거다. 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타이페이처럼 다양하게, 맛있게,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늘 사먹은 수신방 펑리수, 가볍게 먹기 좋은 대만 메달 맥주


타이페이에는 늘 비가 많이 오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비가 와서 아쉽게도 어떤 걸 못 봤다 하는 것도 없다. 우산 쓰고 걸어 다니면서, 비가 많이 오면 찻집에 들어가서 차 한 잔 하면서 비 오는 창밖을 보기도 했다. 대만의 차, 특히 우롱차는 일품이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대만에 가서 찻집에 가서 차를 직접 내려서 먹어보는 운치를 느껴보기를 바란다. 한국에선 쉽게 보기 힘든 다구를 가지고 향긋한 우롱차를 천천히 우려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비 오는 날에는 우롱차 한 잔


커피가 땡기면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에 나온 카페(지금은 폐업)에 가서 앉아서 '여기 계륜미가 있었군' 하며 두리번거리면 마치 영화 속에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영화는 정말 재미없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그 영화 덕분에 카페에서의 시간이 더 값지게 된다면 그걸로 된 것.


늦은 오후에는 딴수이의 멋진 스타벅스에 가서 노을을 바라보며 커피 마시면서 지인들에게 엽서를 쓰기도 했다. 딴수이 역에 내려서 혼잡한 곳을 지나 이윽고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 도착해서 여유롭게 한참 걸으면 스타벅스가 나온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그 앞이 더욱 절경으로 바뀌고, 해가 지면 카페에서 나와서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가끔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면 멍하니 서서 쳐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면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Daughter's cafe, 딴수이 스타벅스


경험이 쌓인다는 건 여유로워진다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여행을 가면 그저 설레고 흥분되고, 그래서 늘 새로운 곳만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갔던 곳을 몇 번이고 또 가는 것도 새로운 곳과는 다른 의미로 참 좋더라. 그런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곳이 타이페이다. 바쁜 여행객도 아니고, 그렇다고 익숙한 현지인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대만식 중국어를 못하고, 대만식 한자를 읽지 못해서 추측으로 하는 것도 많고, 어딘가에 적극적으로 섞이지도 않는다. 뭔가 어정쩡하게 배회하는 느낌이랄까. 특히 혼자 가면 그런 느낌이 더 강해진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좋다. 살짝 멜랑콜리 해지기도 하고. 어차피 아무리 포장한다 해도 결국 여행객은 왔다 떠나는 존재다. 대신 자주 가다 보면 살짝 뒤로 물러서서 현지인과 새로 온 것 같은 여행객들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이것 역시 색다르고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하다. 볼거리 리스트, 쇼핑 리스트, 맛집 리스트에서 벗어나서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기면 가능해진다.


타이페이에 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방랑하고 싶은 날.


* 여러 번 가다 보니 알게 된 몇몇 사실

1) 인천-타오위안 공항 노선보다 김포-송산 공항 노선이 훠어어어얼씬 더 좋다.

2) 한국에서 대만화 환전은 안 하는 게 좋다. 비싸고 취급도 잘 안 한다. 대만 공항에서 그냥 원화로 하든가, 달러를 가져가서 대만 공항에서 하든가, 아니면 각종 ATM을 이용하는 게 낫다.

3) 딘타이펑은 많다. 꼭 본점에 안 가도 된다.

4) 딘타이펑 말고도 딤섬을 파는 곳은 많고, 다른 음식점도 많다.

5) 딘타이펑 맛은 서울이나 대만이나 비슷하다. 대신 더 저렴하고 미묘하게 살짝 더 맛있긴 하다.

6) 펑리수는 웬만하면 다 맛있다. 그래도 유명한 곳이 확실히 더 맛있긴 하다.

7) 일정 중에 비가 오는 날이 하루도 없다면 매우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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