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전나무 숲길
DSLR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중반, 나 역시도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걸린다는 사진병(이라고 쓰고 장비병이라 읽는다)에 걸려서 어디 사진 찍을 곳 없을까 하고 늘 찾아보곤 했다. 그때 <대한민국 베스트 촬영지 55>라는 책을 우연히 접했고, 거기서 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처음 알게 되었다. 촬영지가 55곳이나 있는데 이전에는 가본 적도 없었던 전북 부안의 한 길에 유독 끌렸던 걸 보면 사진에서부터 이미 나와 딱 맞는 무언가가 있었나 보다.
이후 처음으로 방문했던 때는 한 여름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비가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갈까 말까 상당히 고민을 했었는데 그래도 기왕에 마음먹은 거 갔다가 별로면 바로 돌아오기로 하고 일단 출발했다. 대중교통으로 내소사 전나무 숲길까지 가는 길은 꽤 멀다.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부안행 버스를 타고, 부안 터미널에 내린 후에는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 이상 또 가야 한다. 내려서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이 그렇듯 그 앞의 각종 음식점들을 지나면 비로소 무성한 전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비는 그쳤지만 그리 좋지 않은 날씨 때문인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여름이었지만 비가 온 덕분인지 그렇게 덥지도 않았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습기 덕분에 나무의 내음이 더 강해진 것 같기도, 더 싱그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도시의 습기는 불쾌하지만 숲 속 습기는 상쾌하다. 그 속을 계속 걷다 보니 온 몸에 피톤치드가 흘러넘치고 내 몸도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단어 그대로 '산림욕'을 마음껏 즐긴 셈이다. 첫 방문으로 이보다 더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있을까? 함께 방문했던 사람의 손을 더 꼭 잡고 그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시간이 흘러 혼자 전국 여행을 하던 겨울, 그 첫 목적지로 어디를 갈까 하다가 자연스레 부안으로 향했다. 오로지 내소사 한 곳이 목적이었다. 이날은 눈이 엄청 많이 왔는데 그것 때문에 부안에서는 일부 시내버스가 취소되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와버린 것을. 무작정 기다리다 보니 시내버스가 와서 일다 내소사로 출발을 했다.
"내소사 가죠?"
"갑니다. 그런데 날씨가 영 이래서 이따 나올 버스가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 네, 일단 탈게요."
버스 아저씨의 저 말에 순간 흠칫 하긴 했지만 그래도 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부터 버스 타고 왔는데 또 다른 곳으로 가기는 싫었다. 어차피 혼자니까 안 되면 절에서 하루만 재워달라고 하면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터미널이 있는 부안 읍내는 그래도 눈이 곳곳에 치워져 있었지만 숲길엔 눈이 그대로였다. 사람이 정말 없었다. 하긴 이 날씨에 여기에 오는 사람이 좀 이상한 건가. 혼자 숲길을 걸어 내소사로 향했다. 군데군데 몇몇 발자국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내린 그대로 쌓여있는 눈길에 내 발자국을 내면서 걷다 보면 돌아갈 걱정 같은 건 금방 사라진다. 워낙 조용하다 보니 가끔 나무에서 눈 떨어지는 소리, 내가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도 굉장히 크게 들린다. 일상에서 이 정도로 고요한 시간을 즐기기가 어디 쉬운가. 겨울의 추위에 아무도 없는 숲의 상쾌함이 더해지면 머리가 금방 맑아지고 마음도 평화로워진다.
조금 걷다 보니 저 앞에 어떤 할머니가 작은 아이를 업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무에서는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는데 그 아래를 꽁꽁 싸맨 아이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예뻐서 그때 확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
'아... 오기를 정말 잘했다.'
내소사 경내 역시 매우 조용했다. 잠시 절을 둘러보다가 찻집이 있길래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돈을 받는 사람도 없었다. 다기는 여기저기 놓여있고, 차도 있고, 알아서 마신 다음에 다기 정리하고 돈 역시 알아서 넣고 가라고 되어 있었다. 추운 날씨에 숲길을 걸어오느라 꽁꽁 얼었던 몸을 녹일 겸, 향긋한 차도 마실 겸 한 시간 가량을 그곳에 있었다. 그동안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찻집 같은 느낌이랄까.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다행히 눈은 그치고, 부안 읍내로 가는 버스도 무사히 탈 수 있었다. 자칫 무모할 수 있었던 시도가 이렇게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눈 덮인 전나무 숲길을 걸었던 그때, 그리고 혼자 따뜻하고 향긋한 차를 마신 그때는 내가 여행 다니면서 경험한 수많은 순간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순간이다. 이 숲길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갔는데 이제는 예전보다 많이 알려져서인지 전보다 사람도 더 많고, 그래서 여유로움이나 평화로움이 사라져서 아쉬울 따름이다. 감히 '인생' 숲길이라고 할 수 있는 곳, 언젠가 마음이 어지러울 때 꼭 다시 방문해보련다. 아침 일찍이거나 평일에.
아... 서울에서 너무 멀어서 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