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 피에로와 이니에스타

유럽에서 축구 보기

by 본격감성허세남

"델 피에로! 피구! 너가 하도 외쳐서 그 두 사람은 내가 똑똑히 안다."


엄마가 가끔씩 하시던 말씀이다. 고등학교 시절, 야자를 끝내고 집에 오면 그 늦은 시각에도 꼭 축구 게임을 하고 잤는데 그러는 도중에 선수의 이름을 막 외치면서 게임을 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그걸 보면서 얼마나 웃겼을까. 조금 부끄러운 그런 과거다.


특히나 델 피에로(Alessandro Del Piero)는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다. 판타지스타라고 불리던 유려한 플레이, 정확한 킥, 해맑은 표정, 2부 리그로 강등됐음에도 팀에 남아 득점왕까지 차지하며 다시 팀을 1부로 끌어올린 의리까지. 나를 축구 세계로 이끌었던 선수가 바로 델 피에로였다. 내가 언젠가 유럽에 간다면 은퇴하기 전에 꼭 델 피에로를 보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고,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무조건 잡아야 했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경기 일정은 알아놨는데 정작 어디서 표를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어서 어디서나 활발하게 정보 검색을 하기는 어렵던 시절,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세리에 A 리그는 우리나라에 관심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보가 많이 없었다. 어렵사리 현지인에게 정보를 캤더니 Tobacco 가게에 가라고 했다. 담배 가게에 가라고? 모르니까 일단 갔는데 정말 있었다! 그리고 어느 좌석 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구입을 했다. 그 티켓을 손에 들고 얼마나 두근두근 했던지. 여행 다니면서 경험한 특히 짜릿했던 순간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거다.


20210613_125125.jpg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바로 그 꿈의 티켓


델 피에로의 소속팀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토리노를 연고지로 한다. 2006년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바로 그곳, 이탈리아 피에몬테주의 주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행지로는 거의 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심지어 당시는 2008년 초, 올림픽이 열린 지 고작 2년 후였는데. 하긴 이탈리아까지 가서 로마/피렌체/베네치아 등을 두고 굳이 토리노까지 갈 이유는 없지. 이런 것만 봐도 동계 올림픽의 각종 효과라는 게 얼마나 허수인지 하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미국 간다고 솔트레이크 시티에 가나, 러시아 간다고 소치를 가나. 토리노는 오로지 유벤투스와 델 피에로, 그것 때문에 갔다.


밀라노에 숙소를 잡고, 이윽고 토리노로 출발하던 당일. 안개가 어마어마하게 꼈다. 내 생전에 그런 안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숙소 주인이 걱정을 했다.


"갈 수 있겠어요?"

"그럼요. 가야죠. 어떻게든 가야죠."

"상황을 조금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괜찮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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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안개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마치 황폐화된 땅에서 펼쳐지는 SF 영화 속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종이 지도를 보며 방향은 감으로 찾아가며 힘들게 기차역까지 찾아가서 무사히 토리노에 도착하기는 했다. 돌아보면 참 무모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지.


다행히 토리노는 맑았고, 드디어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그 선수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자리도 알고 보니 굉장히 앞이라 정말 자세히 봤다. 경기는 0대 0으로 끝나서 조금 싱거웠지만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델 피에로, 네드베드, 부폰, 마르키시오, 트레제게, 키엘리니, 이런 선수들을 다 볼 수 있었는데!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살면서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삶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축구 경기 하나로 참 별 생각을 다 했다)


레전드들을 눈앞에서 보다


그 뒤로도 유럽에 갈 때마다 기회가 되면 늘 축구 경기를 봤다. 베를린이 2부 리그에 있던 시절에 선수 한 명도 몰라도 그런 경기도 보러 가고, 아무 관심이 없는 라치오 경기도 보러 가고, 세비야/런던에서도 가고, 하지만 역시 백미는 바르셀로나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르셀로나는 꿈의 도시일 거다. 아무리 멋진 풍경이나 멋진 건물이라 하더라도 많이 다니다 보면 무덤덤해지게 마련인데 스포츠는 늘 새롭고 짜릿하다. 특히 약 9만 명의 사람이 가득 참 캄프 누에서 경기를 보는 경험이라면 더더욱. 축구를 하는 시즌에 바르셀로나에 갈 사람이 있다면 관심이 있든 없든 꼭 한 번 보기를 추천한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두 번에 걸쳐서 총 2경기를 봤었다. 레이카르트 감독 시절 1경기, 그리고 과르디올라 감독 시절 1경기. 메시/앙리/차비/비야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있었고 모두 빛났지만 그중 가장 빛났던 선수가 이니에스타(Andrés Iniesta Luján)였다. 내가 본 2경기 모두 뛰었고, 모두 압도적이었고, 심지어 메시보다도 빛났던 바로 그 선수! 그 뒤로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이니에스타가 되었고, 이후 영어 이름을 쓰는 회사에 갔을 때 내 이름 역시 '안드레스(Andres)'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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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르셀로나!


여행이 특히 좋은 건 이렇게 반드시 그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한다 한들 원격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 모든 게 처음이고 모든 순간이 새로웠던 그때가 가끔씩 그립다. 언젠가 다음에는 미국의 보스턴에 가서 NBA 경기도 꼭 보고 싶다. 아마도 토리노 처음 갔을 때의 그 감정이 살아나지 않을까? 아직 기대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 여행 가고 싶다. 늘 보는 국내 말고 국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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