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트립

오토바이 여행의 매력

by 본격감성허세남

오토바이를 타고 정읍을 지나 광주로 향하는 길이었다.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시속 95~100킬로미터 정도로 왕복 4차선 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현타'가 잠깐 왔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내가 참 별 짓을 다 하는구나.'


125CC짜리 스쿠터 PCX로 서울을 출발해서 이미 3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원래 계획은 화성의 융건릉에 들렀다가 아산 현충사와 군산을 거쳐서 전주 근처에 와서 숙박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계획 같은 건 진작에 사라지고, 군산만 들렀다가 어느새 나는 광주를 향해 가고 있었다. 5시간 이상을 달리다 보니 점점 힘에 부쳤다. 서울 시내에서 잠깐 속도 내며 타는 건 매우 즐거운데, 그게 수십 분간 지속되면 즐겁기는커녕 힘만 든다. 혹시라도 넘어지거나 더 빨리 달리는 차 때문에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온 몸에 긴장만 더 되고. 그럼에도 이렇게 떠나온 건 정말 마음 내키는 대로 가는 그 과정 자체가 신선하고 좋았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걸 보는 즐거움도 없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그런 목표도 없지만, 대신 자유로움이 좋았다. 로드 트립의 진짜 매력은 목적지가 아닌 그 과정에 있다.


중간에 잠깐 들렀던 곡성 기차마을 앞 어느 카페


로드 트립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노킹온 헤븐스 도어>에서였다. 시한부의 두 남자가 바다를 보기 위해 떠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일들이 나오는데, 바다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그 과정은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는 그런 모습이 어린 마음에 참 마음에 들었다. 나도 언젠가 저런 거 한번 해봐야지 하는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2004년, 혼자 자전거를 끌고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목표는 제주도를 한 바퀴 돌자는 것. 자전거로 장거리를 가본 적도 없으면서 과감하게 시도했던 그 여행에서 로드 트립의 매력을 제대로 느꼈다. 정말 마음 내키는 대로 가다가 아무데서나 잤다. 하루는 깜깜해질 때까지 달렸는데 숙소가 없어서 민가를 두드려보기도 하고(영화와 달리 재워주지 않더라...), 어쩌다 인연이 되어 제주도 방언을 완벽하게 구사하셔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배려는 따뜻하게 해 주셨던 할머니 집에서 자기도 하고, 힘들어서 좌절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잘 타는 분을 만나서 이런저런 조언을 듣기도 하고, 서귀포에 아무 여관이나 잡았는데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벌벌 떨며 샤워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이것저것 보는 것도 다 귀찮아서 미친 듯이 달리기만 하는 등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얼굴은 새까매지고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세상 무엇보다 즐거웠다. 이후 자동차로도 제주도를 몇 번이나 갔지만 그때 그런 느낌은 결코 얻을 수 없었다. 제주도에 아무리 좋은 곳이 많다 한들, 여전히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건 제주도 서남쪽을 돌아 서귀포시로 들어갈 때의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내리막길이다.


제주도 자전거 여행 당시 잠깐 쉬어갔던 정자


그래도 역시 로드 트립의 백미는 오토바이다. 못 갈 길도 없고, 못 세울 곳도 없다. 좋은 곳이 나오면 잠깐 쉬었다 가고, 뻥 뚫린 길을 갈 때는 혼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 부르기도 한다. 한참 달리다 보면 그 길에 내가 완전히 동화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걷는 건 너무 느리고, 자전거는 힘에 부쳐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생기고, 자동차는 효율적이고 빠르지만 그렇기에 목적 지향적일 수밖에 없고, 역시 오토바이밖에 없다. 나에게 오토바이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다.




광주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은 후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나 광주에 왔는데 저녁에 밥이나 함께 먹을 수 있냐?"

"광주야? 왜 왔는데? 가족들끼리 같이 왔냐?"

"아니, 나 혼자 왔지. 오늘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오토바이 타고 왔다."

"진짜 서울에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고? 위험하지 않아?"

"뭐 얼마나 위험하다고. 이렇게 잘 왔잖아. 가능하면 밥이나 먹자."


그렇게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저녁도 먹고 술도 한 잔 했다. 친구는 나보고 미쳤냐며,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었냐며 물었다. 오토바이를 탄다고 하면 대부분 저런 반응이다. 나쁘진 않아서 나 역시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추위에 벌벌 떨어도, 바람이 너무 강해서 온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도, 오래 달리다 보니 허리가 아파도, 그래도 뿌듯하고 좋은 걸 보니 자유로운 영혼이 맞나 보다. 로드 트립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에 가장 어울리는 여행이다.


다음 날 곡성과 구례를 거쳐 광양에 도착하며 여행은 끝났다. 곡성 기차마을을 지나 섬진강을 따라 구례로 가는 길은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길 옆에는 철쭉이 절정이고,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 길 역시 굽이굽이 이어졌다. 서울에서 광양까지 가는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어떤 지역이 아니라 바로 이 길이었다. 일부러 천천히 달리며 그 순간을 마음껏 음미했다. 이럴 때는 오토바이 타느라 사진을 못 찍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마음속에 한껏 담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거의 10시간 동안 400킬로를 훌쩍 넘는 길을 달렸다.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덤덤했고, 생각보다 덜 힘들었고, 생각보다 추웠다. 그래도 매 순간이 좋았다. 로드 트립을 마치면 무언가를 본 기억보다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더 크게 든다. 참 묘하면서도 재미있는 여행이다. 오토바이 타고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까? 부디 그날이 너무 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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