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최고의 콘서트

12월 31일, 빈

by 본격감성허세남

독일 북부의 함부르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 달린 끝에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했다. 1년의 마지막 날, 빈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에 흔히 볼 수 있는 눈이지만 12월 31일에는 색다르게 보인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거의 수직으로 예쁘게 떨어지던 눈은 주변을 고요하게 만들었고, 사람들도 바쁘게 움직이기보다는 여기저기에 멈춰 서서 내리는 눈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1년 동안 고생했으니 차분하게 마무리하라는 그런 느낌이랄까. 덕분에 발이 다 젖어서 축축했지만 마음은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시청 앞 광장에는 연말 기념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왈츠를 추고 있었다. 역시 요한 슈트라우스와 왈츠의 도시랄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시의 우아한 분위기와 함께 어우러져 비로소 이 도시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31일, 빈의 모습


빈에 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매년 1월 1일에 열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콘서트. 언젠가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클래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12월 31일에 맞춰 빈에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었다. 그런 콘서트를 예매도 하지 않은 채, 그 먼 독일 북부에서 한 번에 빈까지 무리해서 오다니. 신년 콘서트는 복장에 격식도 어느 정도 갖춰야 들어간다던데 나는 비니를 쓰고 청자켓을 입은 여행객 복장이었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 심지어 도착하고 나서야 표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얼마나 대책이 없었는지.


일단 표가 있는지 빈 필 사무실로 무작정 가봤다. 의외로 1장은 구입 가능했는데 가격이 30만 원이 넘었다. 아무리 기대를 안고 왔다지만 당시 돈 없는 가난한 상황에서 막연하게 기대하기만 했던 콘서트를 위해 30만 원이 넘는 표를 살 수는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럴 거면 왜 굳이 빈까지 왔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더라.


하릴없이 한참 거리를 걷다가 문득 또 다른 New Year's Conert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닌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연주하고, 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 딱 하나였다. 사실 어떤 오케스트라 인지도 몰랐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잘 몰랐던 나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베토벤 교향곡 9번이라니 기대가 됐고, 빈 필 신년 연주회를 놓친 이상 빨리 대신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조급한 생각이 들어서 바로 표를 사러 갔다. 가격은 97유로, 약 15만 원 정도의 금액. 가난한 여행객에겐 실로 과감한 지출이었다.


과감한 지출


티켓을 지르고 나니 이윽고 현실로 돌아왔다. 15만 원이면 호스텔 기준 4~5박가량의 돈인데 이걸 어떻게 메꿔야 하나 고민이 됐다. 일단 지른 거 마음 편하게 즐기기로 하고 당장 그날부터 최소한으로 아껴 썼다. 티켓을 제외하면 이날 총지출이,


점심: 1.75 유로 (약 2,500원)

저녁: 2.89 유로 (약 4,000원)

시내 교통비: 5.7 유로 (약 8,000원)

간식비: 3.5 유로 (약 5,000원)


이렇게 총 13.84 유로. 교통비는 무조건 써야 하는 돈이었기에 아낄 수 없었고, 간식은 너무 배고팠지만 참으려다가 도저히 안 되겠길래 다음 날까지 먹을 수 있는 걸로 사서 먹었다. 다시 봐도 실로 눈물겨운 하루였다.


드디어 12월 31일 저녁, 예정된 시간에 맞춰 콘체르트 하우스로 향했다. 연말인 만큼 다들 잘 갖춰 입고 삼삼오오 함께 오는데 나는 혼자 흔한 여행객의 추리한 복장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입장하고, 이후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연주가 진행되었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신년 연주회


아, 그때의 그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전율, 감탄, 소름, 황홀, 아무튼 그런 모든 감정을 다 느꼈던 것 같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라는 곡 자체가 주는 힘이 엄청났고,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혼신의 힘을 다 한 연주가 콘체르트하우스를 가득 채웠다. 다른 곡 없이 딱 그 한 곡만 하고 끝나니까 감동은 더 컸다. 특히 4악장이 연주될 때는 분위기가 최고조가 되어 이 정도면 환희와 함께 새해를 맞을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래서 '환희의 송가'인가 보다. 클래식 음악에 더 관심을 가지고 즐겨 듣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 순간부터였다. 걷다가 우연히 포스터를 발견하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하루를 연명하면서도 과감하게 표를 구입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알고 보니 매년 마지막 날에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동일한 곡을 연주한다고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살면서 다시 한번 꼭 이 연주회에 오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때는 나 혼자가 아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였으면 좋겠다.


빈 시청 앞 연말 콘서트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한참을 혼자 걸었다. 빈 시청사 앞까지 다시 왔는데 그곳에서도 새해맞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1월 1일 0시가 되자 시내 중심 곳곳에서 사람들이 불꽃을 쏘기 시작했다. 한국처럼 조직화된 그런 거대한 불꽃은 아니었지만 각자가 나름대로의 소원을 담아 쏘는 의미 있는 불꽃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뿌듯한 가슴을 안고 빈에서 맞이했던 새해, 아마 앞으로도 살면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런 하루일 거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신년 연주회 덕분이기도 했다. 음악의 힘은 실로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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