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크 디스트릭트 혼자 걷기
혼자 여행을 하면 외롭다. 외로운 건 때로는 좋기도 하고 때로는 싫기도 하지만, 좋고 나쁨을 떠나 외롭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특히나 사람이 드문 곳을 계속해서 걷다 보면 더욱 그렇다.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별 생각이 없어진다. 자아 성찰 그런 것 없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거다. 가끔 좋은 걸 보면 '아, 좋다.' 하고 생각할 뿐. 하지만 그런 감정도 곧 외로움에 묻힌다. 잉글랜드 북부의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그런 외로움을 한없이 느끼기에 최적의 곳이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3시간을 조금 넘게 달리면 윈더미어에 도착한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걷기 여행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예전에 좋아하던 도보 여행가의 글에서 처음 알게 된 레이크 디스트릭트, 원래는 가을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다. 근처의 전형적인 영국식 B&B를 잡아 하루를 묵은 후 다음날 일찍부터 걷기를 시작했다. 어디를 걸을까 많이 고민하다가 결정한 곳은 '피터 래빗'으로 유명한 베아트릭스 포터의 집이 있는 곳으로 정했다. 사실 그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정처 없이 걸을 수는 없으니 하루에 다녀올만한 거리에 있는 무언가를 정했을 뿐, 목표는 걷기였다.
걷기엔 겨울이 좋다. 시작할 때는 조금 시리지만 걷다 보면 금방 춥진 않게 되고, 오히려 조금 시린 공기가 상쾌하다. 호수를 보며 걷고, 영국 시골 특유의 돌담을 보며 걷고, 혼자 쓸쓸하게 서 있는 나무를 보며 걷고, 길을 막는 소떼를 피하며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가끔 사람을 만나면 어찌나 반가운지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서로 웃어 보인 후에 지나간다. 이럴 때는 모든 것이 여유롭다.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 없이 그냥 지금 당장 내가 걷고 있는 내 앞의 길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 이것이 걷기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그러다 보면 마음이 굉장히 평온해진다. 심심하지만 지루하지는 않고, 외롭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포터의 집을 지나 다시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슈퍼마켓에 들러서 사 온 것으로 가볍게 저녁을 해결한 후, 하루의 사진을 정리하고 금방 잠에 들었다. 하루 종일 걷고 나면 불면이 찾아올 틈이 없다. 겨울의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특히나 차분하다. 그곳을 혼자 걷다 보면 나 역시도 그 풍경 속의 한 부분이 된 듯 자연스러워진다.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들뜨지 않고 평온하게 흘러간다. 혼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곳에서는 혼자가 자연스럽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분명히 자기 전까지 날씨가 맑았는데 하루 동안에 이렇게나 많은 눈이 오다니!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았을 때의 그 뽀드득한 소리와 느낌을 맛보고 싶어서 일단 숙소를 나섰다. 멀리 가지는 않고 동네의 뒷산에 올라가기로 했다. 방수 슈즈도 아니고, 길을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가는 것, 조금 헤매면 어때.
하늘은 파랗고, 길은 하얗고, 둘 다 깨끗했다. 걸음 하나하나가 정말 기쁘고 상쾌했다. 겨울에 온다고 해서 이렇게 눈을 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걷기에 좋은 날씨였고, 자는 동안에 눈이 이렇게나 많이 와서 오늘은 눈길을 걷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니, 내가 이렇게나 운이 좋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렇게 도착한 나지막한 산의 정상. 그곳에서 바라본 호수와 그 주변 지역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너무 상투적이지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와... 감탄사 말고 다른 무엇이 필요하랴. 이런 순간에는 외로움조차 잠깐 잊게 된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문득 쓸쓸해졌다. 이렇게 좋은 걸 나 혼자서만 보고 누군가와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고 서러웠던 것 같다. 혼자여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 내 손을 꼭 잡아줬으면 했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 한들 아직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을 방법은 없다.
호수가 보이는 곳에 작은 눈사람 2개를 만들었다. 비록 함께 보지는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내 바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없이 외롭고 자유롭다가 쓸쓸해지는 곳,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그런 곳이었다. 너무나도 평화롭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동시에 가슴이 시린 곳이었다. 지금도 가끔 마음이 번잡할 때는 이때가 생각난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고요했던 1박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