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LA, 토리노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를 우연히 처음 봤던 건 중학교 때였다.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영화 자체가 박진감 있거나 로맨틱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인상적이었다. 심은하라는 배우를 처음 좋아하게 된 계기도 그 영화였다. 영화의 유명한 마지막 명대사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중학생이 뭘 안다고 혼자서 되뇌곤 했을까.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영화의 실제 배경은 군산이다. 그리고 군산에 가면 영화의 주 무대였던 '초원 사진관'이 남아있다. 영화 속 그 위치는 아니지만, 근처 다른 위치에 똑같이 복원해놓은 곳이라고 했다. 하긴 그 위치의 사진관은 촬영을 위해 임시로 만들었던 사진관이라 했으니 아쉽지만 남아있을 수는 없다.
이미 군산의 주요 관광지로 자리매김해서 그런지 의외로 찾기가 쉬웠고 사람도 많았다. 영화와 똑같은 사진관의 모습, 그 앞에 걸려있는 소품용 사진들, 앞에는 한석규가 타고 다니던 빨간 스쿠터, 옆에는 심은하가 주차 단속 때 타고 다니던 티코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 안에 들어가니 영화 속 장면들이 그대로 떠오른다. 영정 사진을 찍는다면서 곱게 차려입고 오셨던 할머니, 더운 날 사진관에 와서 잠시 잠을 취하던 심은하와 웃으며 증명사진을 찍었던 심은하, 한석규가 죽음 직전인 것도 모르고 나중에는 계속 문을 안 연다고 창문에 돌을 던지던 모습까지. 누군가에겐 그냥 건물이겠지만 나에겐 한참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천히 돌아보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군산에 다른 보고 싶은 것은 없었다. 이거 하나면 됐다. 돌아가면서는 오랜만에 다시 한번 영화를 봤다. 나이가 더 들어서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고, 눈시울도 살짝 뜨거워졌다. 나이를 먹으니 괜히 눈물만 는다, 아니면 현장에 다녀와서 그런 걸까.
LA에 갈 때부터 오로지 내 관심은 딱 하나, 바로 영화 <라라랜드>였다. 누군가는 LA 시내는 별 매력이 없다고 하지만 바로 그 매력적인 영화의 무대인데 어찌 매력이 없을까! 뮤지컬 영화의 레전드, 아직도 가끔씩 OST를 듣곤 하는 바로 그 영화. 그것 만으로도 LA는 충분했다.
시작은 영화에서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탔던 Angel's flight, 그리고 마무리는 유명한 'Planetarium' 노래의 무대가 된 그리피스 천문대다. 트램은 사람이 없어서 여유로웠고, 천문대는 끝내주는 날씨 덕분에 환상적이었다. 오후에 가서 완전히 해가 질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앉아있었다. 영화 속 두 사람처럼 탭댄스를 추고 싶었지만 그건 실력도 안 되고 사람도 너무 많아서 차마 추지는 못했다. 시간이 있었다면 라이언 고슬링이 'City of stars'를 부르던 항구도 갔을 텐데, 그러면 틀림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도 걸어봤을 텐데. 언젠가 다시 LA에 간다면 꼭 가보고 말리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 간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그럼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거기에 뭐가 있어요?"
"영화 박물관이 끝내줘요. 영화 좋아하면 꼭 가보세요!"
사람들이 많이 가는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가 아니기에 당연한 반응이긴 하다. 하지만 <애프터 미드나잇>이라는 영화를 본 후로 토리노는 내게 늘 동경의 도시였다. 사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영화 박물관이라는 무대가 너무너무 멋져서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토리노에 갈 기회가 생겨서 내가 가장 먼저 간 곳도 역시 영화 박물관이었다. 사진으로도 담기 힘든 엄청 높은 돔 건물도 멋지지만 그 안의 콘텐츠는 유럽의 그 어떤 박물관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언제나 영화를 좋아했고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취직할 곳을 찾을 때도 영화 배급사에서 일하고 싶어서 그런 곳을 두드리곤 했으니, 이곳이야말로 천국이었다. 수많은 명감독과 명배우의 사진들, 영화 포스터, 실제로 볼 수 있는 옛날 영화 클립들, 각종 영화 촬영 장비들, 멋들어진 장식들. 그래 이런 곳이라면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지. 이렇게 멋진 곳이라면 총으로 위협하는 남친이 있든 말든 결국 사랑에 빠져야지. 안 그럼 젊음이 아니지.
토리노에 오기를 참 잘했다. 오르셰 미술관보다도, 영국 박물관보다도, 프라도 미술관보다도, 유럽의 그 어느 곳보다 좋았던 완벽한 박물관이 바로 이곳에 있다.
때로는 도시가 어느 한 영화로만 기억되기도 한다. 유명한 관광지가 있든 없든 영화 하나만으로도 그곳은 충분히 그 어느 도시보다도 인상적이다. 좋은 콘텐츠의 힘이 이렇게나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