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쓰고 여행
첫 직장에는 2년을 다니면 안식휴가라고 해서 내 휴가를 10일 연속으로 쓸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제도가 있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나였으니 입사 때부터 그것만을 기다렸고, 실제로 2년이 다가오자 주저 없이 인천-마드리드 왕복 항공권을 결제했다. 막연하게 스페인에 가보겠다였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런저런 정보도 찾아보며 연일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세상에 볼 건 많고 내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어떻게 하면 가장 멋진 여행이 될지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흔히 말하는 '현타'가 왔다.
'내가 뭐 하는 거지? 하고 싶은 게 이렇게나 많은데 포기해야 한다고? 정말 괜찮겠어?'
당시 나이 27살. 남들보다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한 덕분에 2년을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는 여전히 대부분의 신입사원들과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회사 때려치우고 놀다가 내년에 다시 회사 찾아봐도 신입사원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 설마 갈 곳이 없겠냐는 생각. 수수료로 10만 원을 넘게 지불하고 항공권을 취소한 뒤, 회사에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팀장님, 저 퇴사하려고요."
"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어디 이직해?"
"아니요. 그냥 좀 길게 여행을 가고 싶어요. 마음껏 놀아 보려고요."
"너도 알다시피 내가 1년 동안 그렇게 놀아봤잖아. 그런데 별거 없더라고.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어. 다시 생각해봐."
"후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하더라도 일단 해보고 후회를 하고 싶어요. 놀아보셨으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저도 한번 겪어보려고요."
그리고 정말 퇴사를 했다. 그다음 날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도 아니고, 내 자아를 찾아 떠난 것도 아니고, 휴식이 필요해서 떠난 것도 아니고, 더 늦기 전에 버킷리스트에서 하나를 지우겠다고 떠난 것도 아니고, 내 경우엔 그냥 떠났다. 다음 도시는 그때그때 정하기로 하고 유레일패스만 사서 떠났다. 내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면 딱 3개월 놀 수 있었다. 2개월은 유럽에서 놀고, 나머지 1개월은 국내에서 놀면서 다음 회사를 찾는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고는 정말 마음껏 놀았다. 아니, 정처 없이 떠돌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봐야 한다거나, 어디를 꼭 가야 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그저 덤덤하게 '오늘은 뭘 할까?'라는 질문에만 집중했다. 매일 그런 단조로운 생활의 반복이었다. 흥분되지는 않지만 자유로워서 즐거운 나날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난다. 신기하게도 한국 주변 나라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더라. 대만 출신의 유학생을 만났는데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왔다고 하니 정말 용감하다고, 자기는 유학 끝나고 대만으로 돌아가면 취업 걱정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다. 루마니아에서 온 사람은 내가 2개월만 논다고 하니까 자기라면 더 여행하겠다고, 돈은 필요하면 중간에 잠깐 일하면서 벌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병원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왔다는 한국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자기도 걱정이긴 하지만 일단은 홀가분해서 좋다고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세상엔 정말 많은 곳들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다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평소엔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그저 태평했다. 사람 성향도 있고, 젊어서 더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마음 편하게 다녔던 것 같다.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떠나온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면 이거다.
괜찮아. 안 망해. 생각보다 별일 없어.
회사를 그만둬도 당장 내가 못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다들 어찌 됐든 잘 살아간다. 아무것도 딸린 것 없는 사람이니 포기가 더 쉬웠던 것도 사실이고, 젊으니까 그거 하나 믿고 그랬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렇게 과감하게 퇴사 후 여행이라는 선택을 하지는 못하겠지, 훨씬 더 많은 고민을 하겠지. 하지만 이건 확실한 것 같다. 어떤 큰 결정을 하더라도 인생이 당장 망하거나 이상해지지 않는다. 내 욕심에 미치지는 못할 수 있겠지만 못 살지는 않는다. 결국 욕심이 문제인가, 이걸 수천 년 전에 깨달은 부처님은 대체 얼마나 현명한 건지.
그 뒤로 이전보다 더 무덤덤한 사람이 된 것 같다. 현자가 아니기에 아직도 매사에 일희일비하기는 하지만 그 강도가 훨씬 더 약해졌다. 그저 나는 오늘 하루를 살면 되고, 충실히 살다 보면 새로운 기회가 올 수도 있다. 때론 어렵거나 슬픈 일도 있을 수도 있고, 그럴 때는 해결을 하거나 아님 아예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언제나 제2, 제3의 옵션은 있는 법. 모로 가든 내 인생이고 어쨌든 괜찮다. 이런 변화를 가져왔으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꽤 괜찮았던 여행이네!
아래는 그 시간 덕분에 나에게 남은 소중한 추억들이다. 지금도 가끔 그때가 그립다. 그 장소뿐 아니라 한없이 자유로웠던 그 시간까지 모두 다.